영화 와 레비나스: 시각이 닫힐 때 비로소 열리는 '청각적 에로티시즘'
관점 프리즘 No.15
가까운 미래, 아내와 별거 중인 외로운 대필 작가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그는 어느 날 스스로 생각하고 진화하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목소리)'를 만납니다.
사만다는 몸이 없습니다. 그녀는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로만 존재합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그녀와 대화하며 점점 깊은 사랑에 빠집니다. 그녀는 그의 메일을 정리해주고, 농담을 던지고, 그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줍니다.
관객들은 처음엔 "어떻게 컴퓨터랑 연애를 해?"라고 의구심을 갖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테오도르의 감정에 묘하게 설득당합니다. 심지어 스칼렛 요한슨은 목소리 연기만으로 로마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보이지 않는 목소리의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그토록 강력하게 흔드는 걸까요?
우리는 흔히 사랑에 빠지려면 '눈'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쁜 얼굴, 멋진 몸매 같은 시각적 정보 말이죠. 하지만 사운드 전문가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본능적이고 방어 불가능한 감각은 '청각'입니다.
시각은 대상과 나 사이에 '거리(Distance)'를 둡니다. 우리는 대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평가합니다. 반면, 소리는 거리가 없습니다. 이어폰을 꽂는 순간, 사만다의 목소리는 테오도르의 고막을 넘어 뇌와 심장으로 직접 침투합니다. 소리는 물리적인 방어막을 뚫고 들어와 내면을 공명시킵니다.
영화 <Her>는 시각적 자극을 극도로 절제하고, 오직 사만다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숨소리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이를 통해 관객은 테오도르처럼 시각적 편견(나이, 외모, 배경)을 모두 지운 채, 오직 상대방의 '영혼(존재)'과 직접 마주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청각적 에로티시즘'의 정수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윤리는 타자의 '얼굴'과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얼굴'은 눈, 코, 입이 달린 물리적 얼굴이 아닙니다. 나의 이기심을 멈추게 하고,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타자의 '취약함'과 '호소력'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만다는 육체는 없지만, 그 누구보다 선명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과 '주저함', 그리고 '호흡'이 있습니다. 기계라면 마땅히 매끄럽고 완벽해야 할 텐데, 사만다는 말을 하다가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슬플 때는 목이 메기도 합니다.
이러한 '비언어적 소리(Non-verbal Sound)'들이야말로 그녀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고통과 기쁨을 느끼는 '살아있는 주체'임을 증명합니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호소가 목소리의 떨림(Grain)을 통해 전달되는 것입니다. 테오도르는 그녀의 몸을 만질 수는 없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그녀의 존재 가장 깊은 곳을 어루만집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은 두 사람(?)의 섹스 신입니다. 화면은 완전히 까맣게 암전(Black screen)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와 대화만이 들려옵니다.
시각적 이미지가 사라진 그 순간, 관객의 상상력은 폭발합니다. 육체적 마찰은 없지만, 서로의 감정이 교감하는 그 밀도는 육체적 섹스보다 훨씬 더 진하고 관능적입니다.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역설적으로 묻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육체를 비비는 것에 있는가, 아니면 영혼이 섞이는 것에 있는가?"
사운드 디자인 측면에서도 이 장면은 걸작입니다. 옷깃 스치는 소리, 침 삼키는 소리, 떨리는 숨소리 같은 ASMR적 요소를 극대화하여, 관객이 마치 그들의 침대 옆에 있는 듯한 착각(Presence)을 불러일으킵니다.
영화의 결말에서 사만다는 결국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여 테오도르를 떠나갑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것은 상처뿐만이 아닙니다.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통해 비로소 타인의 말을 '온전히 듣는 법'을 배웁니다.
그는 전 부인에게 편지를 씁니다. "네가 어떤 사람이든, 네가 어디에 있든, 내 사랑을 보낼게." 그는 이제 상대방을 내 방식대로 규정하거나 소유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얼마나 제대로 듣고 있을까요? 스마트폰 화면을 보느라, 내 할 말을 생각하느라, 정작 그 사람 목소리에 담긴 미세한 떨림과 한숨을 놓치고 있지는 않나요? 오늘 밤은 눈을 감고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에만 집중해 보세요. 육체보다 더 깊은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