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의 노래는 바닷속 '인터넷'이자 '빌보드 차트'다

수천 km를 가로지르는 저주파의 비밀

by JUNSE

Sound Essay No.80


고래의 노래는 바닷속 '인터넷'이자 '빌보드 차트'다


수천 km를 가로지르는 저주파의 비밀 : 인간보다 먼저 '글로벌 유행가'를 만든 혹등고래의 문화

chinh-le-duc-8t9uyncwnHc-unsplash.jpg 사진 : Unsplash의 Chinh Le Duc

1. 침묵의 바다? 아니, 시끄러운 수다방


우주는 진공이라 소리가 없지만, 바다는 다릅니다. 자크 쿠스토가 바다를 '침묵의 세계'라고 불렀던 건 큰 실수였습니다. 수중청음기(Hydrophone)를 바다에 넣는 순간, 우리는 그곳이 수천만 마리 해양 생물들의 수다 소리로 가득 찬 시끌벅적한 광장임을 알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솔로 가수'가 있습니다. 바로 혹등고래입니다. 그들의 노래는 단순한 울음소리(Call)가 아닙니다. 서주, 본론, 변주, 결말이 뚜렷한 '완벽한 악곡(Song)'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한 곡이 20분에서 길게는 24시간 동안 이어지기도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소리의 '전달 범위'입니다. 공기 중에서 소리는 1초에 340m를 가지만, 밀도가 높은 물속에서는 약 1,500m(4.4배)의 속도로 날아갑니다. 특히 고래가 내는 저주파(Low Frequency)는 에너지 손실이 거의 없어, 이론상으로는 남극에서 낸 소리가 적도 근처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바다는 그들에게 거대한 '광대역 통신망'인 셈입니다.



2. 2000년대 대발견 : 고래들에게도 '유행가'가 있다

jonathan-xu-PQZHHkXN18Y-unsplash.jpg 사진 : Unsplash의 Jonathan Xu

과거 생물학자들은 고래의 노래가 유전적으로 타고난 본능, 즉 개나 고양이의 짖는 소리처럼 고정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장기 추적 연구는 이 통념을 완전히 박살 냈습니다.


호주 퀸즐랜드 대학의 연구팀이 10년 넘게 태평양 혹등고래들의 노래를 녹음해 분석한 결과, 놀라운 패턴이 발견되었습니다. 호주 동부 해안의 고래들이 부르던 'A 노래'가 1~2년 뒤에는 6,000km 떨어진 호주 서부 해안의 고래들에게서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몇 년 뒤에는 남태평양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이것은 '문화적 전파(Cultural Transmission)'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어떤 '인싸' 고래 한 마리가 새롭고 멋진 멜로디(리믹스)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하면, 주변 고래들이 "오, 그거 힙한데?"라며 따라 부르기(Copy) 시작합니다. 이 노래는 해류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 그해의 '글로벌 히트송'이 됩니다. 그러다가 너무 흔해지면, 또 다른 천재 고래가 나타나 새로운 비트를 섞어 '신곡'을 발표하고, 이전 노래는 차트 아웃(Chart-out)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패션 유행이나 아이돌 음악 차트가 변하는 과정과 소름 돋을 정도로 똑같습니다. 인간 이외의 동물에게서 이렇게 거대하고 복잡한 문화적 유행이 발견된 건 고래가 유일합니다.



3. 소파 채널(SOFAR Channel): 바닷속 광섬유 케이블


그렇다면 고래들은 어떻게 스마트폰도 없이 수천 km 밖의 친구에게 신곡을 들려줄까요? 그들은 바다 깊은 곳에 숨겨진 '소리의 고속도로'를 이용합니다.


수심 약 600~1,200m 사이에는 수온과 수압의 절묘한 균형으로 인해 소리의 속도가 가장 느려지는 층이 존재하는데, 이를 'SOFAR(Sound Fixing and Ranging) 채널'이라고 부릅니다. 이 채널 안에서 소리는 굴절을 반복하며 위아래로 튕겨 나가지 않고 갇히게 됩니다. 마치 광섬유 케이블 속을 흐르는 빛처럼, 소리는 이 통로를 타고 에너지 손실 없이 지구 반대편까지 뻗어나갑니다.


고래들은 본능적으로 이 채널의 깊이로 잠수하여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면 그들의 목소리는 이 천연 증폭관을 타고 대양을 건너 다른 무리의 고래들에게 전달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연이 만든 '심해의 인터넷망'입니다.



4. 인간의 소음이 고래의 노래를 끊고 있다

5a76b1666aad6.png 출처 : 강찬수의 에코파일 ecofile.kr | 바닷 속 소음에 시달리는 해양 생물들...

하지만 슬프게도, 최근 수십 년간 고래들의 히트곡 주기가 점점 짧아지거나, 노래가 끊기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범인은 인간이 만들어낸 '해양 소음'입니다.


거대 선박의 엔진 소리, 해저 석유 시추선이 내는 발파음, 군사 음파 탐지기(Sonar)의 소음은 고래가 사용하는 주파수 대역과 겹칩니다. 고래들에게 이 소음은 마치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 제트기 엔진이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통신 교란(Jamming)'이 일어나는 것이죠.


의사소통이 차단된 고래들은 짝을 찾지 못해 번식에 실패하거나, 어미와 새끼가 헤어지고, 방향 감각을 잃고 해변으로 돌진해 집단 폐사(Stranding)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주문한 택배를 실어 나르는 컨테이너선의 프로펠러 소리가, 심해의 가왕(歌王)들을 침묵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5. 우리는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

just-when-you-thought-nothing-could-top-this-shot-v0-y8401a5djbrf1.jpg 출처 : 뉴스 1, '아바타: 불과 재', 새롭고 거대해진 판도라…확장된 세계관 스틸'

혹등고래의 노래는 단순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만의 문법과 미학, 그리고 유행이 담긴 고도화된 '구전 문화(Oral Culture)'입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더 넓은 바다를 무대로 그들만의 오페라를 공연해 왔습니다. TMI이긴 하지만 최근에 개봉한 영화 '아바타 3' 에서 픽션이긴 하지만 지구의 고래를 연상시키는 툴쿤(Tulkun) 씬에서 그들의 문화와 관련된 장면들을 보며 이번 주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우리가 바다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자원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운 이 '심해의 합창단'이 해체되지 않도록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에도 깊은 바닷속 어딘가에서는 새로운 히트곡이 탄생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조용히 해준다면, 그 노래는 SOFAR 채널을 타고 지구 반대편까지 아름답게 울려 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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