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레종 소리의 비밀: '맥놀이(Beat)' 현상

쇠의 두께 차이가 만들어낸 '숨 쉬는 소리'의 물리학

by JUNSE

Sound Essay No.90

에밀레종 소리의 비밀 : '맥놀이(Beat)' 현상

천 년을 이어온 울림 : 쇠의 두께 차이가 만들어낸 '숨 쉬는 소리'의 물리학

출처 : 위키백과

1. 전설이 된 소리, 과학이 된 울림


경주에 있는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이 종을 타종하면 그 소리는 맑은 쇳소리로 시작했다가, 곧이어 웅장한 저음으로 바뀌고, 마지막에는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는 긴 여운을 남깁니다.


사람들은 그 소리가 마치 "에밀레(어미 때문에)..."라고 부르는 어린아이의 원망 섞인 울음소리 같다고 해서 '에밀레종'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현대 음향학자들이 정밀 분석한 결과, 이 종소리에는 사람의 감정을 흔드는 치밀한 음향학적 장치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리가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는 '맥놀이(Beat)' 현상입니다.



2. "웅~ 웅~" 소리가 숨을 쉰다

출처 : 나무위키 '맥놀이' - 1Hz의 차이만큼 발생하는 모듈레이션

서양의 종(Church Bell)은 "땡!" 하고 치면 소리가 점점 작아지며 깔끔하게 끝납니다(Decay). 하지만 한국의 에밀레종은 다릅니다.


종을 치면 처음엔 큰 소리가 나다가 1~2초 뒤에 소리가 잦아듭니다. 그런데 3초 뒤에 다시 "우우웅~" 하고 소리가 커졌다가, 다시 작아지고, 또다시 커집니다. 마치 종이 살아서 '숨을 쉬는(Breathing)' 것 같은 이 현상이 무려 1분 이상 반복됩니다.


이것이 바로 '맥놀이'입니다. 맥놀이란 진동수(주파수)가 아주 미세하게 다른 두 개의 소리가 섞일 때 발생하는 파동의 간섭 현상입니다.


보강 간섭: 두 파동의 마루가 만나면 소리가 증폭됩니다(커짐).


상쇄 간섭: 마루와 골이 만나면 소리가 소멸합니다(작아짐).


이 두 현상이 교대로 일어나면서 규칙적인 리듬감(Waviness)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3. 비대칭의 미학 : 일부러 다르게 깎았다?


그렇다면 이 미세한 주파수 차이는 어디서 올까요? 비밀은 종의 '두께'에 있습니다. 에밀레종은 겉보기엔 완벽한 대칭 원통형 같지만, 정밀 스캔을 해보면 부위마다 두께가 미세하게 다릅니다.


완벽하게 균일한 종이라면 딱 하나의 주파수(예: 64Hz)만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두께가 불균일한 에밀레종은 타종 시 서로 다른 두 개의 주파수, 예를 들어 64Hz64.3Hz가 동시에 발생합니다. 이 0.3Hz의 차이가 바로 맥놀이의 주기입니다.


놀라운 점은 신라 시대의 장인들이 이것을 의도했느냐는 것입니다. 현대 학자들은 이것이 실수가 아니라 '고도로 계산된 비대칭'이라고 추정합니다. 종의 내부를 깎아낼 때 일부러 편차를 주어, 두 소리가 서로 싸우지 않고 아름답게 섞이도록 설계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복원된 종들은 이 미묘한 오차를 재현하지 못해 그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4. '음관(음통)'의 역할 : 고주파 필터링

출처 : 연합뉴스 '에밀레종' 천년의 울림 계속될까…유홍준 "종은 쳐야 한다"

에밀레종에는 서양 종이나 중국 종에는 없는 독특한 구조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종 머리 꼭대기에 솟아 있는 대나무 모양의 관, '음관(음통)'입니다.


과거에는 이것이 단순한 장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음향 실험 결과, 이 구멍은 '잡음 제거 필터(Low-pass Filter)'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종을 칠 때 발생하는 날카로운 금속성 고음(High Frequency)과 잡음들은 이 관을 통해 밖으로 빨리 빠져나가 버립니다. 반면, 웅장하고 부드러운 저음(Low Frequency)은 종 내부에 남아 오랫동안 맴돕니다.


덕분에 에밀레종은 쇳덩어리를 때리는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귀를 찌르는 소음 없이 묵직하고 거룩한 저음만이 천 년을 넘게 울려 퍼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가장 슬픈 소리는 수학에서 나온다


전설 속의 아이는 쇳물에 녹지 않았습니다(실제 성분 분석 결과 인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장인들은 아이의 울음소리보다 더 호소력 짙은 소리를 '과학'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종소리가 3초 간격으로 "웅~... 웅~..." 하며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 리듬은, 인간이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호흡 주기와 일치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때 알 수 없는 안도감과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슬픔을 느낍니다.


가장 완벽한 기술은 보이지 않습니다. 에밀레종은 천 년 전의 하이테크 기술이 어떻게 인간의 감성을 가장 깊은 곳까지 건드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세계 음향학의 불가사의이자 걸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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