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폰은 귀 위에 짓는 '이동식 건축물'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마이클 불의 '청각적 버블'

by JUNSE

Sound Essay No.102

헤드폰은 귀 위에 짓는 '이동식 건축물'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마이클 불의 '청각적 버블' : 소음의 도시에서 나만의 공간을 건축하는 법

myznik-egor-W45foaB4TKc-unsplash.jpg 사진 : Unsplash의 Myznik Egor

1. 도시의 유목민들은 귀 위에 집을 짓는다


출근길 지하철 풍경을 떠올려 보십시오.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 어깨가 부딪히는 좁은 간격, 덜컹거리는 열차 소음과 안내 방송. 물리적인 공간(Physical Space)은 숨 막힐 듯 비좁고, 타인과의 거리는 불쾌할 정도로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의 표정은 묘하게 평온합니다. 대부분 귀에 무선 이어폰이나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몸은 만원 지하철이라는 '공적 공간(Public Space)'에 갇혀 있지만, 의식은 자신이 선택한 음악이 흐르는 '사적 공간(Private Space)'에 머물고 있습니다. 옆 사람이 통화하는 소리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에 의해 벽돌담 밖의 소음처럼 아득해지고, 자신이 고른 플레이리스트가 그 자리를 채웁니다.


이 순간, 헤드폰은 단순한 음악 재생 장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시멘트와 벽돌 없이 짓는 가장 견고한 벽이며,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나를 격리시키는 '이동식 건축물(Mobile Architecture)'입니다. 20세기 초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에게는 창작을 위한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면, 21세기의 현대인들은 비싼 임대료 대신 헤드폰이라는 장비를 통해 도시 한복판에 "자기만의 방"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2. 마이클 불의 통찰 : 청각적 버블(Auditory Bubble)

71pws-MyQ3L._SL1360_.jpg 출처 : www.amazon.co.uk

영국 서식스 대학교(University of Sussex)의 사회학자 마이클 불(Michael Bull) 교수는 이 현상을 가장 깊이 있게 연구한 학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Sound Moves: iPod Culture and Urban Experience>에서 현대인이 이어폰을 끼는 행위를 '청각적 버블(Auditory Bubble)'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불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현대 도시는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과잉 자극 상태입니다. 원하지 않는 광고판, 자동차 경적, 타인의 대화 소리가 끊임없이 침범합니다. 과거의 인간은 이 소음들을 수동적으로 견뎌야 했습니다. 하지만 워크맨(Walkman)과 아이팟(iPod), 그리고 스마트폰의 등장은 인간에게 '청각적 통제권'을 쥐여주었습니다.


- 시간의 재구성 : 지루한 출근 시간을 좋아하는 팟캐스트나 빠른 템포의 음악으로 채움으로써, 버려지는 시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바꿉니다.


- 공간의 재구성 (Mobile Privatization) : 마이클 불은 이를 '이동하는 사유화(Mobile Privatization)'라고 불렀습니다. 공공장소를 걸어가고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내 방에 있는 것과 같은 사적인 안락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즉, 헤드폰은 물리적 벽을 세우지 않고도 타인과의 '사회적 거리'를 확보하게 해주는 비가시적인 건축 자재인 셈입니다.



3. 노이즈 캔슬링 : 소리로 쌓은 벽


이 '건축적 기능'을 완성한 기술이 바로 액티브 노이즈 캔슬링(ANC: Active Noise Cancellation)입니다. 이 기술의 원리는 단순히 귀를 막는 차음(Isolating)이 아닙니다. 외부 소음의 파형을 분석한 뒤, 그와 정반대되는 '역위상(Anti-phase)' 파동을 쏘아 소리를 소리로 지워버리는 기술입니다.


이것은 건축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시사점을 줍니다.


전통적인 건축은 소음을 막기 위해 두꺼운 콘크리트나 이중창을 사용합니다. 즉, '물질(Mass)'로 소리를 막습니다. 하지만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은 '에너지(Energy)'로 소리를 막습니다.


헤드폰을 켜고 '노이즈 캔슬링' 모드로 진입하는 순간, 세상의 소음이 "슈욱-" 하고 사라지는 그 정적. 그것은 마치 꽉 막힌 도로 한복판에 갑자기 나만 들어갈 수 있는 투명한 유리방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기술 덕분에 우리는 시끄러운 카페를 도서관으로, 굉음이 울리는 비행기 기내를 조용한 서재로 순식간에 리모델링(Remodeling)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머레이 셰이퍼와 분열 음향(Schizophonia)

maxresdefault.jpg 출처 : www.soundpedro.org

캐나다의 작곡가이자 사운드스케이프 연구의 창시자인 R. 머레이 셰이퍼(R. Murray Schafer)는 이러한 현상을 '분열 음향(Schizophonia)'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Schizo(분열) + Phonia(소리) : 원래 소리는 소리를 내는 대상과 시각적으로 함께 존재했습니다. 새소리는 새에게서, 물소리는 강에서 났죠. 하지만 녹음 기술과 헤드폰의 발달로 소리와 원천이 분리되었습니다.


헤드폰을 쓴 채 거리를 걷는 사람을 상상해 봅시다. 눈앞에는 잿빛 도시의 삭막한 풍경이 펼쳐지지만, 귀에는 열대 우림의 빗소리나 웅장한 영화 음악이 들립니다. 시각적 현실과 청각적 현실의 완벽한 분리.


셰이퍼는 이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지만, 현대적인 관점에서 이는 '현실의 영화화(Cinematization of Reality)'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내가 걷는 이 지루한 골목길이 영화 <라라랜드>의 OST를 듣는 순간 낭만적인 뮤지컬 무대로 변하는 경험. 헤드폰 사용자는 도시라는 스크린 위에 자신만의 사운드트랙(BGM)을 입히는 감독이자 주인공이 됩니다. 이것은 건축을 넘어선 '공간의 증강(Augmented Reality)'입니다.



5. 발터 벤야민의 산책자(Flâneur)와 21세기의 고독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19세기 파리의 거리를 배회하던 '산책자(Flâneur)'들에 주목했습니다. 그들은 군중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그들과 어울리지 않고, 거리를 냉철하게 관찰하는 고독한 관찰자들이었습니다.


21세기의 헤드폰 사용자들은 '디지털 산책자(Digital Flâneur)'입니다.


그들은 거리에 존재하지만, 결코 거리에 속하지 않습니다. 헤드폰을 끼고 있다는 것은 타인에게 보내는 명확한 '사회적 신호(Social Cue)'입니다.


"나에게 말을 걸지 마시오. 나는 지금 당신들과 다른 공간에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인이 과밀한 도시에서 자신의 자아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입니다. 수많은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피로감 속에서, 잠시나마 연결을 끊고 고독할 권리를 확보하는 것. 마이클 불 교수는 이를 "따뜻한 고독(Warm isolation)"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차가운 단절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안락한 고립이라는 뜻입니다.



6. 건축가로서의 청취자

jon-tyson-zgG0lN0itcE-unsplash.jpg 사진 : Unsplash의 Jon Tyson

우리는 흔히 건축을 '부동산'이나 '건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건축의 본질이 '인간이 머무는 공간을 규정하고 환경을 제어하는 행위'라면, 헤드폰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널리 보급된 건축 양식일지 모릅니다.


매일 아침, 당신은 헤드폰을 챙겨 집을 나섭니다. 그것은 단순히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옥철의 소음을 차단할 '벽'과, 지루한 풍경을 아름답게 바꿀 '창문'과, 나만의 정서를 채울 '가구'를 챙기는 것입니다.


당신이 플레이리스트를 고르고 볼륨을 조절하는 그 행위는, 오늘 당신이 머물 공간을 설계하는 건축적인 행위입니다. 비록 물리적인 땅 한 평 없을지라도, 우리는 소리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가장 안전하고 완벽한 '나만의 성(Castle)'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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