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듣는 타임머신 :프루스트의 마들렌과 '회고 절정'

우리는 왜 20대에 들었던 노래를 평생 잊지 못하는가

by JUNSE

Sound Essay No.105

귀로 듣는 타임머신 : 프루스트의 마들렌과 '회고 절정'

뇌과학이 밝혀낸 음악의 기억 소환 능력 : 우리는 왜 20대에 들었던 노래를 평생 잊지 못하는가

출처 : amzon.de

1. 홍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 그리고 3분의 타임머신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꼽히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이 방대한 소설의 문을 여는 것은 아주 사소한 사건입니다.


주인공 마르셀은 어느 날 홍차에 조개 모양의 과자 '마들렌(Madeleine)'을 적셔 한 입 베어 뭅니다. 그 순간, 부드러운 식감과 라임 꽃의 향기가 입안에 퍼지자마자 그는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을 느낍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의 눈앞에 어린 시절 살았던 콩브레(Combray) 마을의 풍경, 그곳의 사람들, 공기, 심지어 당시의 감정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맛과 향기가 잊혀졌던 무의식의 댐을 무너뜨리고 기억의 홍수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를 문학적, 심리학적 용어로 '프루스트 효과(Proust Effect)'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마들렌'은 과자가 아니라 '음악'입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들려온 90년대 발라드, 혹은 학창 시절 좋아했던 아이돌의 노래. 그 3분의 선율이 귀에 꽂히는 순간, 우리는 순식간에 20년 전의 교실로, 첫사랑과 헤어지던 버스 정류장으로 강제 소환됩니다. 단순히 "그때 그 노래 참 좋았지" 정도의 회상이 아닙니다. 당시의 온도, 습도, 심장 박동까지 재현되는 물리적인 시간 여행입니다. 도대체 뇌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음악은 시간을 거스르는 힘을 갖게 된 것일까요?



2. 심리학의 수수께끼 : 회고 절정 (Reminiscence Bump)


우리가 평생 듣는 음악은 수만 곡이 넘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들었던 음악만이 그토록 강력한 향수를 불러일으킬까요? 40대에 들은 명곡은 왜 20대에 들은 유행가만큼 가슴을 울리지 못할까요?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회고 절정(Reminiscence Bump)'이라는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생애 기억을 그래프로 그려보면, 10세에서 30세 사이의 기억 회상률이 비정상적으로 높게 솟아오른 혹(Bump) 모양을 보입니다.


자아의 형성기 : 이 시기는 인간이 '나는 누구인가(Identity)'를 정의하는 결정적인 시기입니다. 첫사랑, 입시, 대학 입학, 취업, 독립 등 인생의 가장 격렬한 사건들이 이때 몰려 있습니다.


감정의 코팅 : 뇌는 감정이 강하게 실린 사건을 더 오래 기억합니다. 사춘기와 청년기의 폭발적인 호르몬과 감수성은 당시 들었던 음악에 강력한 '감정의 코팅'을 입힙니다.


그래서 17살에 들었던 라디오헤드의 노래는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안했던 청춘의 '자아(Self)' 그 자체입니다. 나이가 들어 그 노래를 다시 듣는 것은,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가장 뜨거웠던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나는 행위인 것입니다.



3. 뇌과학의 증명 : 내측 전두엽피질 (The Hub of Time)

출처 : memorygroup.ucdavis.edu

이 심리학적 가설을 뇌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은 2009년, 미국 UC 데이비스(UC Davis)의 신경과학자 페트르 자나타(Petr Janata) 교수입니다. 그는 <대뇌 피질(Cerebral Cortex)> 저널에 "음악이 자서전적 기억을 소환하는 뇌의 지도"를 발표했습니다.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그들이 과거에 즐겨 듣던 음악을 들려주며 fMRI(기능적 자기공명영상)로 뇌를 촬영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음악이 나오자마자 뇌의 '내측 전두엽피질(Medial Prefrontal Cortex, MPFC)'이 불꽃놀이처럼 활성화되었습니다.


- MPFC의 역할 : 이곳은 음악을 처리하는 영역이 아닙니다. 바로 '추억''자아'를 담당하는 영역입니다.


- 연결의 허브 : 자나타 교수는 MPFC가 '허브(Hub)' 역할을 한다고 밝혔습니다. 음악 신호가 들어오면, MPFC가 즉시 해마(기억 저장소)와 편도체(감정 센터)에 신호를 보내, 그 음악과 얽혀 있는 에피소드와 감정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즉, 우리 뇌 속에는 음악과 추억이 따로 저장된 것이 아니라, MPFC라는 강력한 접착제에 의해 '하나의 패키지'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노래의 전주만 들어도(청각 자극), 뇌는 자동으로 그 시절의 영상(시각 정보)과 감정(정서 정보)을 동시에 로딩하는 것입니다.



4. 알츠하이머도 지우지 못하는 멜로디

출처 : libro.fm

음악 기억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치매(알츠하이머) 환자들을 통해 더욱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알츠하이머는 기억의 저장소인 해마를 파괴하여, 가족의 이름도, 어제 먹은 점심 메뉴도 잊게 만듭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음악적 기억'은 병이 말기까지 진행되어도 끝까지 살아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을 잃어버린 환자가 젊은 시절 부르던 노래가 나오자 가사를 정확하게 따라 부르고, 무표정하던 얼굴에 눈물을 흘립니다. 신경과 의사 올리버 색스(Oliver Sacks)는 그의 저서 <뮤직필리아(Musicophilia)>에서 이를 "음악은 뇌의 가장 깊고 원초적인 부분에 새겨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음악 기억은 해마가 아닌 '운동 피질(Motor Cortex)''소뇌' 등 뇌의 전반에 걸쳐 분산 저장됩니다. 마치 컴퓨터의 하드디스크가 고장 나도, 클라우드 서버 곳곳에 백업 파일이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음악은 인간이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고 있는 '존재의 끈'인 셈입니다.



5. 의지적 기억 vs 불수의적 기억

출처 : 나무위키 'Creep'

다시 프루스트로 돌아가 봅시다. 프루스트는 기억을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의지적 기억 (Mémoire volontaire) : "내가 1999년에 뭘 했지?"라고 앨범을 뒤지며 머리로 찾아내는 지적이고 건조한 기억.

불수의적 기억 (Mémoire involontaire) : 마들렌의 향기나 음악처럼,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 자극에 의해 '갑자기 덮쳐오는' 생생하고 감각적인 기억.


프루스트는 '불수의적 기억'만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주는 진짜 열쇠라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책이나 일기장은 우리에게 '과거의 사실(Fact)'을 알려주지만, 음악은 우리에게 '과거의 느낌(Feeling)'을 돌려줍니다.


라디오헤드의 <Creep>을 들을 때 우리는 1993년이라는 연도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 세상에 섞이지 못해 외로웠던 자신의 '떨림'을 다시 체험합니다. 음악은 과거를 정보가 아닌 '체험'으로 복원합니다.



6. 음악은 잃어버린 시간을 위한 책갈피다


우리는 모두 시간이라는 거대한 강물에 떠밀려 앞으로만 나아갑니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기억은 희미해집니다. 이것이 인간의 숙명입니다.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그 흐르는 시간 속에 '책갈피'를 꽂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음악'입니다.


어느 날 문득, 카페에서 흘러나온 노래 한 소절에 발걸음을 멈춘 적이 있다면, 당신은 그 순간 책갈피가 꽂힌 페이지로 시간 여행을 한 것입니다. 그 노래가 슬프게 들린다면, 그것은 노래가 슬퍼서가 아닙니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 시절이 내 안에 여전히 찬란하게 살아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음악이 있는 한, 우리의 시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칸딘스키는 색채를 듣고, 쇤베르크는 불협화음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