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은 인류 최초의 악기였다

선사시대 인류는 왜 빛도 없는 어둠 속에 그림을 그렸나

by JUNSE

Sound Essay No.110

동굴은 인류 최초의 악기였다

고고음향학(Archaeoacoustics)의 도발적 가설 : 선사시대 인류는 왜 빛도 없는 어둠 속에 그림을 그렸나

image.png 출처: 나무위키 '알타미라 동굴'

1. 침묵의 갤러리인가, 울림의 공연장인가


프랑스의 라스코(Lascaux)나 스페인의 알타미라(Altamira) 동굴 벽화를 볼 때, 우리는 흔히 이것을 '선사시대의 미술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시인들이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며 시각적 이미지를 남긴 장소라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이 해석에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하나 있습니다.


"왜 하필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접근하기도 힘든 동굴 깊숙한 곳에 그림을 그렸을까?"


단순히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라면 입구 근처의 평평하고 밝은 벽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굳이 좁은 통로를 기어들어가, 울퉁불퉁하고 어두운 구석에 들소와 말을 그렸습니다.


최근 고고학계와 음향학계의 접점에서 탄생한 '고고음향학(Archaeoacoustics)'은 이에 대해 매우 흥미롭고 도발적인 가설을 제기합니다. 만약 그들이 벽을 '캔버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소리가 가장 잘 울리는 '공명판'으로 선택했다면 어떨까요? 이 글은 동굴 벽화와 거석 유적을 '눈'이 아닌 '귀'로 다시 읽어내려는 학자들의 연구와, 아직은 정설로 굳어지지 않았으나 무시할 수 없는 설득력을 가진 그들의 주장을 소개합니다.



2. 이고르 레즈니코프의 실험 : 그림은 소리의 표지판이다

image.png 출처 : www.sudouest.fr

이 분야의 선구자인 파리 10대학의 이고르 레즈니코프(Iegor Reznikoff) 교수는 1980년대부터 프랑스의 여러 동굴을 탐사했습니다. 그는 조명을 끄고 어둠 속에서 동굴 안을 걸으며 다양한 높낮이로 소리를 냈습니다(Chanting).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동굴 내부에는 소리가 유독 크고 길게 울려 퍼지는 '공명점(Resonance Point)'들이 존재합니다. 놀랍게도 그가 찾은 공명점의 위치와, 벽화가 그려진 위치는 90% 가까운 일치율을 보였습니다.


- 소리가 울리는 곳에 그림이 있다 : 벽화 밀집 구역은 예외 없이 강한 에코(Echo)나 공명 효과가 발생하는 지점이었습니다.

- 붉은 점의 비밀 : 그림이 없는 곳에 뜬금없이 찍혀 있는 붉은 점들은, 시각적으로는 무의미해 보였으나 음향학적으로는 소리가 가장 증폭되는 '스위트 스폿(Sweet Spot)'을 표시한 지점이었습니다.


레즈니코프는 이를 바탕으로 "벽화는 일종의 음향 표지판"이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어둠 속에서 횃불에 의지해 의식을 치르던 샤먼들에게, 그림은 "이곳이 바로 노래를 불러야 할 무대다"라고 알려주는 큐 사인(Cue Sign)이었다는 것입니다.



3. 스티븐 월러와 영혼의 목소리 (Echo Spirits)

image.png 출처 : www.archpaper.com

미국의 암각화 연구가 스티븐 월러(Steven J. Waller) 박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고대인들에게 '메아리(Echo)'가 어떤 의미였을지 상상해 보라고 말합니다.


과학적 지식이 없던 고대인들에게, 내가 소리를 질렀는데 절벽 너머에서 똑같은 소리가 되돌아오는 현상은 '초자연적인 영혼의 응답'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월러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말발굽 소리와 유사한 타악소리를 냈을 때 메아리가 발굽 소리처럼 반사되는 지점에는 어김없이 '유제류(말, 들소 등 발굽 달린 동물)'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즉, 고대인들은 단순히 동물을 그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소리를 내면 동물의 영혼이 대답해 주는(메아리치는) 신성한 장소를 찾아, 그 영혼을 시각화해 둔 것입니다. 벽화는 소리와 이미지가 결합된 '인터랙티브 미디어(Interactive Media)'였습니다.



4. 스톤헨지 : 거대한 야외 공연장?

image.png 출처 : www.history.com

영국의 미스터리한 거석 유적 스톤헨지(Stonehenge) 역시 고고음향학의 주요 연구 대상입니다. 샐퍼드 대학의 음향 공학자 루퍼트 틸(Rupert Till) 교수는 스톤헨지의 원래 형태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복원하여 음향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거대한 돌들은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고, 내부로 반사시켜 증폭시키는 '음향 렌즈'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스톤헨지 내부에서는 160Hz 대역의 저음이 강력하게 공명했습니다.


틸 교수는 스톤헨지가 단순한 달력이나 무덤이 아니라, 수천 명이 모여 춤추고 노래하던 '고대의 레이브(Rave) 파티장' 혹은 '야외 원형 극장'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일정한 리듬의 북소리가 돌에 반사되어 증폭될 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강력한 청각적 몰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5. 110Hz의 비밀 : 뇌를 바꾸는 주파수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흥미로운 가설은'110Hz 진동수'에 관한 것입니다. 몰타의 지하 신전인 '할 사플리니(Hal Saflieni)'를 비롯한 여러 고대 유적의 공명 주파수가 약 110Hz 대역에 맞춰져 있다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UCLA의 이안 쿡(Ian Cook) 박사는 110Hz의 소리가 인간의 뇌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했습니다. 그 결과, 이 주파수의 소리를 들을 때 뇌의 언어 중추 활동은 줄어들고, 정서와 직관을 담당하는 우뇌의 활동이 급격히 활성화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대인들은 경험적으로 '의식의 변성(Trance)'을 유도하는 특정 주파수를 알고 있었으며, 동굴과 신전을 그 주파수를 증폭시키는 '거대한 악기'로 설계했다는 추론이 가능해집니다. 그들은 건축을 통해 소리를 조율하고, 소리를 통해 인간의 정신을 조율했던 것입니다.



6. 시각 중심주의를 넘어선 멀티미디어의 기원


물론 이러한 주장들은 아직 '가설'의 단계입니다. 4만 년 전의 소리를 녹음한 테이프가 발견되지 않는 한, 이것을 완벽한 사실로 증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가설들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묵직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고대 예술을 지나치게 '시각 중심적'으로만 해석해 왔습니다. 박물관 유리관 속에 갇힌 유물, 도록에 실린 평면적인 벽화 사진만으로는 그 시대의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어두운 동굴 속, 흔들리는 횃불의 불빛(조명), 벽에 반사되어 울리는 웅장한 북소리와 주술사의 노래(음향),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춰 살아 움직이는 듯 보이는 벽화(영상). 이 모든 것이 결합된 순간, 동굴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인류 최초의 '가상 현실(VR) 체험관'이자 '멀티미디어 공연장'이었습니다.



7.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

image.png 출처 : 나무위키 '동굴'

사운드 디자인은 20세기 영화 산업과 함께 탄생한 현대 기술이 아닙니다. 인류는 문자를 발명하기 훨씬 이전부터, 공간의 울림을 이용해 신과 소통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음향 설계자(Acoustic Architect)'였습니다.


우리가 콘서트홀에서 가슴을 울리는 사운드에 전율하고, 성당의 긴 잔향 속에서 경건함을 느끼는 본능은, 어쩌면 4만 년 전 동굴 속에서 울려 퍼지던 그 태고의 울림에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박물관의 침묵 속에 갇혀 있던 고대인들의 노래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들은 벽에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소리를 그렸던 것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숲은 침묵으로 죽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