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치밀한 기획자, 작곡가
Sound Essay No.7
우리는 종종 작곡가를 어두컴컴한 작업실에 홀로 틀어박혀, 고뇌에 찬 얼굴로 영감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기만을 기다리는 고독한 예술가로 상상합니다. 밤새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다 마침내 터져 나온 악상에 희열을 느끼는, 그런 영화적인 순간들을 말이죠. 미디어는 끊임없이 ‘천재의 영감’이라는 신화를 팔아먹고, 우리는 기꺼이 그 판타지의 소비자가 됩니다.
하지만 그 환상은 오늘부로 깨뜨려야겠습니다. 20년 넘게 작곡을 통해 수많은 작업물을 만들고 타분야와 협업했으며 기획자로 일하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면서 느낀 점은, 현실의 작곡가는 영감에 의존하는 몽상가라기보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완수하는 가장 치밀하고 냉철한 ‘기획자(Planner)’에 가깝다는 것 입니다. 그들의 작업실은 영감을 위한 성역이라기보다, 제한된 자원과 시간 속에서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프로젝트의 ‘워룸(War Room)’과 같습니다.
모든 프로젝트는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합니다. 기획자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프로젝트 목표’나 ‘핵심 컨셉’이라 부르고, 작곡가의 세계에서는 ‘모티브(Motive)’ 혹은 ‘주제(Theme)’라고 부르죠. 단 두 개의 음으로 영화 전체의 공포를 지배했던 존 윌리엄스의 <죠스> 테마처럼, 좋은 모티브는 그 자체로 강력한 잠재력을 가집니다.
하지만 아이디어가 좋다고 해서 프로젝트가 저절로 성공하지는 않듯, 작곡가는 모티브가 떠오른 순간부터 기획자의 모드로 전환됩니다. 그는 먼저 이 아이디어를 해부하고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Why?’ - 이 음악은 왜 존재하는가? (프로젝트의 목적): 이 모티브를 통해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 싶은가? 슬픔? 환희?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 이것은 영화의 특정 장면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작품인가? 프로젝트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하는 기획자의 첫 단계와 정확히 같습니다.
‘What?’ - 무엇으로 표현할 것인가? (핵심 리소스 선정): 이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할 악기는 무엇인가? 날카롭고 차가운 느낌을 위해 금속성의 신시사이저를 쓸 것인가, 아니면 따뜻하고 인간적인 느낌을 위해 첼로를 선택할 것인가? 이는 프로젝트의 성격에 맞춰 어떤 기술 스택을 사용할지, 어떤 팀원과 함께할지를 결정하는 리소스 분석 단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How?’ -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 (스토리텔링과 구조 설계): 모티브를 어떻게 발전시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곡)로 만들 것인가? 언제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Climax), 언제 숨을 고를 여유를 줄 것인가(Bridge)? 이는 사용자의 경험 흐름(User Journey)을 설계하고, 서비스의 전체 구조를 짜는 기획자의 정보 설계(Information Architecture) 과정입니다.
이처럼 작곡의 시작은 영감의 발현이 아니라, 주어진 아이디어의 잠재력을 파악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하는 냉철한 분석의 과정입니다.
아이디어를 분석하고 전략을 세웠다면, 이제 그것을 실행 가능한 구체적인 ‘문서’로 만들어야 합니다. 기획자에게 그것이 상세한 내용과 일정이 담긴 ‘기획서’나 ‘스토리보드’라면, 작곡가에게는 바로 ‘악보(Score)’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악보를 단순히 음표의 나열이라고 생각하지만, 악보는 역사상 가장 완벽하고 정밀한 형태의 프로젝트 설계도 중 하나입니다.
타임라인 (Timeline): 악보의 가로축은 명확한 시간을 나타냅니다. ‘Allegro(빠르게)’, ‘Adagio(느리게)’ 같은 템포 지시는 프로젝트의 전체 일정을 규정하고, 각 마디는 개별 과업의 마일스톤이 됩니다.
리소스 분배 (Resource Allocation): 각 파트별(바이올린, 트럼펫, 팀파니 등)로 지정된 악보는 각 팀원(연주자)에게 부여된 명확한 역할과 책임(R&R)입니다. 누구 하나라도 자신의 파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전체 프로젝트는 와해됩니다.
품질 관리 (Quality Assurance): ‘p(피아노, 여리게)’, ‘f(포르테, 강하게)’ 같은 셈여림 표시는 결과물의 품질을 규정하는 가이드라인입니다. 작곡가는 이 지시어를 통해 각 파트의 사운드 밸런스를 조율하고, 전체 프로덕트의 완성도를 컨트롤합니다.
이 설계도가 얼마나 강력하냐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100명의 전문가(오케스트라 단원)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이 문서(악보)를 나눠주면, 단 몇 시간의 리허설만으로 수십 분짜리의 복잡하고 거대한 프로젝트(교향곡)를 거의 완벽하게 실행해낼 수 있습니다. 자, 당신 회사의 기획서는 과연 이 정도의 명확성과 실행력을 담보하고 있습니까?
특히 영화음악의 거장 한스 짐머(Hans Zimmer)의 작업 방식은 작곡가가 얼마나 뛰어난 기획자이자 프로젝트 매니저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는 한 편의 영화를 위해 수백 개의 트랙이 쌓인 거대한 오디오 파일을 다룹니다. 감독이라는 까다로운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고, 빡빡한 개봉 일정을 맞추기 위해 여러 명의 어시스턴트 작곡가, 엔지니어, 연주자들과 협업하며 전체 프로덕션을 진두지휘합니다. 그의 스튜디오는 예술가의 아틀리에라기보다, 거대한 사운드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자 ‘스타트업’에 가깝습니다.
물론 기획자와 작곡가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대부분의 프로젝트 기획자는 여러 이해관계자(임원, 투자자, 동료)를 설득하고 타협하며 최종 결정을 함께 만들어가지만, 작곡가는 이 모든 과정의 ‘최종 결정권’을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둡니다.
이것은 때로는 축복이지만, 때로는 가장 무거운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모든 성공의 영광을 독차지할 수 있지만, 모든 실패의 책임 또한 홀로 짊어져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곡이 세상에 나왔을 때 대중이 외면한다면, 그것은 시장 분석을 잘못한 마케터의 탓도, 개발을 잘못한 개발자의 탓도 아닌, 온전히 총괄 기획자인 작곡가 자신의 탓이 됩니다.
결국 좋은 음악은 순간의 영감에 기댄 요행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왜 만드는가’라는 명확한 목표 아래, 수많은 변수와 제약 조건을 고려하여 최적의 경로를 설계하고, 다양한 리소스를 조율하며, 최종 결과물의 품질까지 책임지는 한 명의 뛰어난 기획자가 벌이는 치열한 사투의 결과물입니다.
그러니 이제,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라는 말 뒤에 숨지 마십시오. 당신의 아이디어가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면, 그것은 영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기획’이 부족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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