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누구랑 대화하고 있니?

: 음악을 들을 때, 사실은 나 자신과 대화하고 있었다

by JUNSE

Sound Essay 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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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누구랑 대화하고 있니?

: 음악을 들을 때, 사실은 나 자신과 대화하고 있었다!?

우리는 종종 음악을 ‘만국 공통의 언어’라는 편리하고 낭만적인 표현으로 부릅니다. 국적이나 문화를 넘어 멜로디만으로도 기쁨이나 슬픔 같은 보편적 감정을 나눌 수 있으니, 얼핏 그럴싸하게 들립니다. 듣기 좋은 말이고, 선물 포장지처럼 그럴듯해 보이죠. 하지만 저는 오늘 이 그럴듯한 포장지를 뜯어내 볼까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음악은 '언어'가 아닙니다. 만약 음악이 정말 ‘언어’라면, 이 세상 모든 언어의 기본 조건인 ‘명확한 정보 전달’이 가능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으로 “오늘 오후 3시에 광화문 스타벅스 앞에서 만나자. 늦으면 커피는 네가 사는 거다”라는 문장을 전달해 보십시오. 아마 베토벤이 무덤에서 뛰쳐나와도 불가능할 겁니다. 어떤 위대한 작곡가도 음표의 조합만으로 이런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브런치의 저의 또다른 글 '음악이라는 세계:음악은 언어다!?' 참조)


음악을 ‘언어’로 규정하는 순간, 음악으로 가능한 또다른 가능성들을 언어라는 틀에 가두어 정보전달이라는 기능에만 초점을 두어 다른 모든 가능성들을 스스로 제거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감정의 전달과 공유가 과연 음악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역할일까요?


감정의 스펙트럼, 그리고 단순화라는 재앙


SSI_20140208010616.jpg 출처 : 서울신문 '0.2초 사이 달라진 감정 알아보시겠습니까?' 삽입 이미지 (청림출판사 제공)


물론 음악이 언어처럼 명확한 정보를 전달하지 못하는 대신, 기쁨, 슬픔, 분노와 같은 원초적인 감정의 ‘결’을 전달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스펙트럼은 사실상 무한대에 가깝습니다. 똑같이 연인과 헤어져도, 그 슬픔의 종류는 수만 가지입니다. 후련함이 섞인 슬픔, 세상을 다 잃은 듯한 절망적 슬픔, 분노로 이글거리는 슬픔, ‘이제 나는 뭘 해야 하지?’라는 막막함이 앞서는 슬픔. 이 모든 감정의 미묘한 결을 ‘슬픔’이라는 단어 하나로 퉁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요?


만약 음악이 언어처럼 기능하여 ‘이것은 슬픈 음악이다’라고 규정되는 순간, 이 섬세하고 다채로운 감정의 스펙트럼이 ‘슬픔’이라는 납작한 단어 하나로 뭉개지는 엄청난 재앙이 초래됩니다. 이는 마치 세상의 모든 색을 ‘빨강, 파랑, 노랑’으로만 구분하려는 시도와 같습니다. 당신의 그 복잡다단하고 유니크한 감정이 그렇게 단순화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예술이 그저 단순한 감각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우리들이 예술을 두고 이렇게나 많은 논의를 펼치고 있을까요? 음악이 가진 힘은 바로 이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점에 있습니다.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다른 수많은 '감각'들을 언어가 아닌 다른 형태로 우리들에게 펼져보일 수 있게 되는 것 입니다. 음악은 감각들만이 아니라 인간이 겪는 수많은 상황과 현상을 언어가 아닌 소리의 형태로 인간에게 인지하게 합니다. 마치 부처나 예수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빗대어' 군중(대중)들에게 설명하듯이 말이죠.



음악은 메시지가 아니라 거울이다


vince-fleming-Vmr8bGURExo-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Vince Fleming


그렇다면 음악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이 명확하게 규정이 되었다면 우리는 이러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전에 음악은, 언어가 되기를, 무언가를 명확하게 전달하려는 시도를 멈출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질문의 첫 걸음을 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일 첫 걸음은 바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경험’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우리들이 음악을 들으면서 제일 먼저 하는 실수가 바로 음악을 통해 무언가를 '전달'받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데이터가 케이블을 통해 다른 저장장치로 전달되는 것과는 다른 것이죠. 어떤 음악을 들을 때 당신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특정한 감정이나 기억은, 작곡가가 의도한 정답을 당신이 정확하게 수신한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작곡가가 정교하게 설계한 ‘소리의 거울’에 당신의 내면이 비친 결과물입니다. 작곡가는 음표와 리듬, 음색을 통해 하나의 상황, 음악적인 맥락을 제시할 뿐입니다. 그 맥락을 통해 당신이 어떤 감정이나 감각을 경험하는지는 전적으로 당신의 몫입니다. 당신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경험, 마음 깊숙이 묻어두었던 기억,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음악이라는 촉매제에 반응하여 수면 위로 떠 오르는 것, 그것이 바로 '음악 감상'의 첫걸음 입니다.


스크린샷 2025-09-17 오후 8.27.19.png Radiohead 'Pablo Honey' 앨범 커버


라디오헤드의 <Creep>을 들으며 어떤 이는 10대 시절의 짝사랑을 떠올리지만, 다른 이는 거대한 조직 속에서 느꼈던 소외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음악은 동일하지만, 그 음악이 비추는 내면의 풍경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즉, 음악을 듣는 행위는 타인의 말을 듣는 수동적인 ‘청취’가 아니라, 나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능동적인 ‘대화’에 가깝습니다.



자기 이해, 모든 창작의 가장 단단한 출발점


tom-allport-eoRxpc7GDbM-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Tom Allport


이 행위는 왜 중요할까요?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이 시간은, 결국 내 주변의 환경을 통해 경험했던 모든 것들과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 그 상태를 위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청자는 나의 감정에 공감하는 음악을 들을 때는 그러한 상황을 즐기고 여기에서 위로를 받으며 또다른 생각을 펼쳐나갈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벗어나는 '음악적인 현상'에 집중하여 오롯이 음악을 듣는 경험을 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음악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더 명확하게 들여다보고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창작의 가장 단단한 첫발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나의 한계에서 벗어나 내가 아닌 세상과 접촉하는 경험, 그것이야 말고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로 스스로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않을까 합니다. 나 자신의 감정, 감각의 결을 읽어내고 나를 이해한 뒤,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마음, 생각을 지나 어떤 '현상' 그 자체로써의 결과물을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표현의 영역이 아닌 감각의 영역에 다다른 '결과물'이 당신을 향해 다가오늘 것을 목도할 수도 있을 거니다.


앞으로도 음악(또는 예술)을 통해 인간의 인식이나 관점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변화해야하는지,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짧은 저의 생각을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Sound Foundry & Co. 사운드 클래스에서는 기술을 넘어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소리라는 가장 정직한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발견하고, 그 발견을 토대로 당신만의 고유한 창작 세계를 구축하는 여정을 함께합니다. 이제 타인의 음악 속에서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당신의 가장 위대한 창작은 바로 이 대화의 끝에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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