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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삶에 스며드는 사운드 디자인이란?

건축가의 철학으로 바라본 공공장소의 소리 풍경 설계

by JUNSE

Sound Essay No.16

사람의 삶에 스며드는 사운드 디자인이란?

: 건축가의 철학으로 바라본 공공장소의 소리 풍경 설계


시간과 함께 살아가는 무주 '등나무' 공설 운동장


일반적인 공설 운동장은 육중한 콘크리트 구조물과 귀를 때리는 고출력 스피커로 지역 주민들에게 위압감을 줍니다. 행사가 있을 때만 시끄럽게 사용되고, 평소에는 텅 빈 채 온기를 잃어버린 공간이 되기 쉽습니다.


출처 : 눌산의 뜬금없는 여행 '무주 공공건축프로젝트 3 등나무운동장(무주 공설운동장)


故 정기용 건축가는 무주 공설 운동장의 스탠드를 등나무 덩굴이 감싸고 올라가는 구조로 설계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며 등나무가 자라 그늘을 만들고, 운동장이 단순한 경기장이 아닌 주민들이 언제든 찾아와 쉬고 담소를 나누는 '마을의 정자'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나쁜 소리'


사진: Unsplash의Piron Guillaume


병원 복도를 가득 채운 차갑고 날카로운 기계음, 도서관의 숨 막히는 정적을 깨는 무심한 안내 방송, 이른 아침 지하철역의 피로감을 증폭시키는 고음의 경고음. 우리는 매일 수많은 공공장소의 소리들에 둘러싸여 살아가지만, 그 소리들이 우리의 감정과 행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의식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대부분의 소리는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은 채, 기능적 필요에 의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건축은 '사람의 삶을 조직하는 일'이라고 말하며 땅과 사람의 이야기에 먼저 귀를 기울였던 건축가가 있습니다. 바로 '감응의 건축'이라는 자신만의 철학을 펼쳤던 정기용 건축가입니다. 그는 건물을 짓기 전에 그곳에 살게 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과 바람, 그리고 땅이 품고 있는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의 건축은 화려한 형태를 뽐내는 대신, 사용자의 삶에 조용히 스며들어 그들을 위로하고 돕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 글은 정기용 건축가의 '감응'이라는 철학을 사운드 디자인의 영역으로 가져와 우리 주변에 무심코 지나쳤던 소리들을 사운드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다시 제안하고자 하는 글입니다. '감응의 사운드 디자인'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단순히 소음을 제어하거나 듣기 좋은 배경음악을 까는 것을 넘어, 공간의 목적과 사용자의 정서적 상태에 '감응'하여 그들의 경험의 질을 높이는, 보이지 않는 건축 행위, 일종의 세심한 '배려'입니다.



정기용의 철학에서 배우는 '감응'의 사운드 디자인 3가지


출처 : 말하는 건축가 Talking Architect, 2011 이미지


정기용 건축가가 땅과 사람을 읽어냈던 방식은, 사운드 디자이너가 공간의 소리를 설계하는 방식에 적용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듣는' 디자인 (Listen First, Design Later) 정기용 건축가는 설계에 앞서 오랜 시간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무주군청의 민원실 의자는 왜 딱딱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공간을 바라보았기에 가능했습니다. 사운드 디자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소리를 채우기 전에, 먼저 그 공간의 현재 '소리 풍경(Soundscape)'을 듣고, 그곳의 사람들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이 공간에서 어떤 소리가 당신을 가장 불편하게 합니까?", "어떤 소리가 들릴 때 안정감을 느낍니까?" 병원의 사운드를 설계한다면,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의료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첫 번째 단계가 되어야 합니다.


장소의 '삶'을 존중하는 디자인 (Design for Context) 그의 건축은 장소가 가진 고유한 맥락을 존중했습니다. 진부한 관공서의 형태를 탈피한 '무주군청'이나,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게 설계된 '기적의 도서관'은 모두 그 장소의 '삶'을 깊이 이해한 결과물입니다. 사운드 디자인 역시 장소의 목적과 그곳에서 일어나는 삶의 행태를 존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도서관의 사운드 디자인은 '집중'과 '사색'을 도와야 하며, 어린이 병동의 사운드 디자인은 '두려움'을 줄이고 '즐거움'을 유도해야 합니다. 모든 공간에 동일한 기준의 '정숙'이나 '음악'을 적용하는 것은 장소의 삶을 무시하는 일방적인 설계일 수 있습니다.


기술이 아닌 '사람'을 위한 디자인 (Human-centric, Not Tech-centric) 정기용 건축가는 기술이나 미학을 과시하기 위한 건축을 경계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래서 사람이 행복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사운드 디자인 분야는 종종 최신 음향 기술이나 복잡한 시스템을 과시하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 소리가 과연 사람의 경험을 긍정적으로 만드는가?"입니다. 때로는 사용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복잡한 인터랙티브 사운드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따뜻한 음색의 차임벨이 훨씬 더 '좋은' 디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기술은 목적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돕기 위한 도구로써 존재해야 합니다.



'감응'의 사운드 디자인 적용 : 병원, 도서관, 그리고..


이러한 원칙들을 실제 공공장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불안을 잠재우는 병원의 소리 풍경

- 현재 대부분의 병원은 환자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생명 유지 장치의 날카로운 경고음, 치과에서 나는 차가운 기계소리,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기계 소음은 환자와 보호자뿐만 아니라 의료진의 스트레스까지 가중시킵니다.

사진: Unsplash의Owen Beard

- 제안 : 모든 경고음을 '위험' 신호로 통일하는 대신, 소리의 정보 체계를 재설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명과 직결되지 않는 단순 알림(수액 교체 등)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애플의 노트북이나 넷플릭스 고유의 시작 사운드와 같이 주변의 청자들(의사 포함)에게 조금은 친근하게 들릴 수 있는 부드러운 사운드를 기계에 장착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위급 상황의 경고음 역시 고음의 비프음 대신,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면서 훨씬 잘 인지할 수 있는 다른 사운드로 대체함으로써 정보는 명확히 전달하되 거부감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집중에 깊이를 더하는 도서관의 소리 풍경

- 도서관의 '완벽한 정숙'은 오히려 작은 소음(기침, 책장 넘기는 소리)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어 이용자의 집중력을 깨뜨립니다. 이는 마치 방음 스튜디오에 갇힌 듯한 부자연스럽고 압박적인 환경을 만듭니다.


사진: Unsplash의Daniel Forsman


- 제안 : 완벽한 침묵을 강요하는 대신, '긍정적인 소리'로 공간을 채우는 '사운드 마스킹(Sound Masking)' 기법을 도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우 낮은 볼륨으로 백색소음이나 자연의 소리(나뭇잎 스치는 소리,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 등)를 재생하여, 거슬리는 소음은 중화시키고 안정적인 청각적 배경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물론 공간이 허락된다면 기존의 공간과 새로운 공간이 함께 있다면 도서관 이용자들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수많은 공공 공간이 있습니다. 사운드 디자이너는 주변의 공간들에서 '소리'라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조금은 특별한 '관점'으로 그곳을 보다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많은 난관이 있겠지만 우리만의 관점으로 공간을 개선시킬 아이디어를 발견하고 사람들과 공유하며 주변 환경을 개선시키는 것도 사운드 디자이너의 역할 중 하나일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세심한 배려


출처 : 유튜브채널 kculturechannel '정기용, 무주 건축에 감응을 더하다.' 삽입 이미지


정기용 건축가는 "건축은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조직하고 위로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철학은 사운드 디자이너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사운드 디자인은 단순히 소리를 만드는 기술인가, 아니면 소리를 통해 사람들의 경험과 감정을 조직하고 위로하는 인문학적 행위인가?


'감응'의 사운드 디자인은 소리를 기술의 영역에서 삶의 영역으로 가져오려는 시도입니다. 공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만날 때, 소리는 비로소 우리 삶에 스며들어 경험의 질을 높이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사운드 디자이너들은 보이지 않는 공간을 설계하는 '소리의 건축가'로서, 사람들이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머물 수 있는 청각 환경을 만들어갈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기용 건축가가 남긴 '감응'이라는 가치를 소리로 실천하는 작은 시작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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