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의 여백과 칸딘스키의 점, 선, 면으로 배우는 소리의 관계학
Sound Essay No.21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막막함이 있습니다. 드럼, 베이스, 기타, 신시사이저, 보컬... 세상에서 가장 멋진 소리들을 하나씩 정성껏 쌓아 올렸는데, 어찌 된 일인지 소리가 많아질수록 음악은 풍성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답답하고 흐릿해집니다. 마치 비좁은 방에 아끼는 가구들을 너무 많이 들여놓아, 결국 그 어떤 가구도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서로의 존재를 방해하게 된 것처럼 말이죠. 소리의 윤곽은 밀도 높은 안갯속을 헤매는 것처럼 흐릿해지고, 처음에 느꼈던 생생한 감동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어쩌면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더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비워두는가'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 텅 빈 캔버스에 점 하나를 툭 찍거나, 넓은 미술관 바닥에 돌멩이 몇 개를 무심히 내려놓고는 우리에게 깊은 사유와 울림을 주는 예술가가 있습니다. 바로 이우환 화백입니다. 그에게 작품이란 캔버스 위의 점이나 공간 속 돌멩이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 사물과 텅 빈 공간 사이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관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를 둘러싼 '팽팽한 긴장감'이야말로 작품의 본질입니다.
이 글은 사운드 믹싱이라는 기술적인 작업을, 돌멩이와 여백의 관계를 탐구한 이우환의 철학과, 소리를 색채로 보고 들었던 화가 칸딘스키의 눈을 빌려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도입니다. 믹싱이란 단순히 소리를 채우고 쌓는 일이 아니라, 각 소리가 서로 편안하게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들 사이의 '의미 있는 관계'를 디자인하는 일이라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우리가 마주한 텅 빈 오디오 트랙(DAW)의 타임라인은,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가 말했던 '기저면(The Basic Plane)', 즉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캔버스와 같습니다. 그는 이 캔버스 위에 점, 선, 면이라는 세 가지 기본 재료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우리의 소리 역시 이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소리의 '점(Point)': 리듬의 심장을 찍다 "쿵, 치, 쿵, 치..." 하고 찍히는 드럼 비트는 음악의 가장 기본적인 '점'입니다. 칸딘스키에게 점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그 자체로 강렬한 긴장을 품은 요소였듯, 킥 드럼과 스네어의 짧고 응축된 타격음은 음악의 심장 박동과 리듬의 뼈대를 만듭니다. 하이햇의 잘게 쪼개지는 소리들은 캔버스 위에 흩뿌려지는 섬세한 모래알 같고, 탐탐의 묵직한 울림은 캔버스에 깊이 스며드는 잉크 자국과도 같습니다. 믹싱의 시작은 이 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얼마나 선명하고 힘 있게 찍히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딱딱하고 날카로운 808 킥 드럼은 예리한 기하학적 점과 같고, 부드럽고 둥근 어쿠스틱 킥 드럼은 주변에 온화한 후광을 가진 점과 같습니다. 우리는 트랜지언트 셰이퍼(Transient Shaper)나 컴프레서(Compressor) 같은 도구를 사용해 이 점들의 윤곽을 더 날카롭게 다듬거나, 부드럽게 뭉개며 그 성격을 결정합니다.
소리의 '선(Line)': 감정의 흐름을 그리다 칸딘스키에게 '선'이란 움직이는 점의 흔적이었습니다. 음악에서 '선'은 바로 멜로디와 하모니의 흐름입니다. 낮고 묵직하게 바닥을 기어가는 베이스라인은 그림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차분한 수평선과 같고, 화려하게 솟구치는 보컬 멜로디나 기타 솔로는 뜨거운 에너지를 가진 역동적인 대각선과 같습니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이어지는 이 선들은 듣는 이의 감정을 이끌고 이야기의 서사를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이 선들이 가진 각자의 성격, 즉 따뜻함과 차가움, 두꺼움과 얇음을 먼저 이해하고, 그 선들이 서로 아름답게 교차하거나 평행을 이루도록 도와야 합니다.
소리의 '면(Plane)': 분위기의 색채를 칠하다 칸딘스키의 그림에서 점과 선이 주인공이라면, '면'은 그들이 살아 숨 쉬는 무대이자, 그림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배경입니다. 음악에서 소리의 '면'은 바로 공간을 가득 채우는 '분위기'와 '질감'을 의미합니다. 길고 부드럽게 공간을 감싸는 신시사이저 패드 사운드는 캔버스를 채우는 넓고 옅은 색면과 같습니다. 따뜻한 아날로그 신스 패드는 칸딘스키가 사랑했던 노란색처럼 따스하고 희망적인 분위기를, 차가운 디지털 신스 패드는 내면으로 침잠하게 하는 파란색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리버브(Reverb)나 딜레이(Delay) 같은 공간계 이펙터 역시 강력한 '면'을 만드는 도구입니다. 이들은 소리들을 안아주는 투명한 색면을 만들어, 건조했던 점과 선들을 하나의 통일된 공간과 분위기 속에 존재하게 합니다. 캄캄하고 깊은 동굴 같은 리버브(면) 위에 찍힌 드럼 비트(점)는, 바싹 마른 방 안에서 들을 때와는 전혀 다른 공포감과 신비감을 자아냅니다. 결국 점과 선이 어떤 색과 질감을 가진 '면' 위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감정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에겐 점(리듬), 선(멜로디), 면(분위기)이라는 소리의 재료들이 있습니다. 이우환 화백이라면 이 재료들을 어떻게 배치할까요? 아마 그는 재료들을 무작정 욱여넣는 대신, 각 재료가 가장 자기답게 빛날 수 있는 자리를 찾아주고,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관계'와 '여백'에 온 신경을 집중할 것입니다. 좋은 믹싱이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관계'와 '여백'을 디자인하는 일입니다.
주파수의 여백: 소리에게 각자의 방을 선물하기 좋은 믹싱은 좋은 건축과 같습니다. 한 집에 사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각자의 방을 만들어주듯, 음악 속 모든 소리에게 자신만의 주파수 공간을 선물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킥 드럼과 베이스기타는 둘 다 낮은 저음역대에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목소리가 아주 큰 친구들입니다. 이 둘을 한 소파에 겹쳐 앉히면 서로의 목소리에 가려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각자의 매력적인 이야기는 전혀 들리지 않을 겁니다. 이때 EQ(이퀄라이저)라는 도구는, 마치 "베이스야, 너는 이쪽에서 조금만 목소리를 낮춰줄래? 그래야 킥 드럼의 멋진 심장 소리가 더 잘 들릴 것 같아"라고 부드럽게 교통정리를 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서로 겹치는 주파수 영역을 조금씩 정리해주면, 비로소 각자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주파수의 여백'이 생겨납니다. 이 여백 덕분에 소리들은 서로 싸우지 않고, 오히려 서로의 존재를 더 빛내주는 아름다운 관계를 맺게 됩니다.
시간의 여백: 침묵에게 말을 걸게 하기 이우환의 작품에서 텅 빈 공간이 그 위의 돌멩이만큼이나 중요한 것처럼, 음악에서도 소리가 없는 '침묵'은 소리만큼이나 중요합니다. 폭발적인 후렴구가 터져 나오기 직전의 아주 짧은 정적은,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듣는 이의 심장을 조이는 서스펜스를 만듭니다. 애절한 피아노 연주가 끝난 뒤에 남는 잔향과 그 뒤의 고요함은, 그 멜로디의 감정이 우리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완성할 시간을 선물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 '시간의 여백'을 두려워한 나머지, 불필요한 소리로 빈틈없이 채우려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고수는 침묵을 가장 극적인 악기처럼 사용할 줄 압니다. 때로는 과감히 소리를 멈춤으로써, 듣는 이가 방금 들었던 소리의 의미를 곱씹어볼 시간을 주고, 다음에 올 소리를 간절히 기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우환 화백은 자신의 작품이 미술관에 놓인 돌멩이와 캔버스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관객이 그 공간에 들어와 돌과 여백의 관계를 느끼고,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을 더할 때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고 말입니다.
사운드 믹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빽빽하게 소리로 가득 찬 음악은 듣는 이에게 어떤 생각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일방적인 외침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만, 어떤 질문도 던지지 않는 음악입니다. 반면, 아름다운 여백을 가진 음악은 듣는 이를 그 공간 안으로 정중히 초대합니다. 우리는 그 비어있는 공간 속에서 자신만의 감정을 채워 넣고, 소리와 소리 사이를 자유롭게 거닐며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합니다. 결국, 잘 된 믹싱이란 듣는 이의 마음속에 가장 근사한 '상상의 공간'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믹싱이라는 작업을 주파수와 레벨을 맞추는 기술적인 일로만 생각하면, 우리는 금세 길을 잃고 맙니다. 하지만 이우환의 돌멩이와 칸딘스키의 점, 선, 면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지도를 얻게 됩니다. 믹싱이란, 소리라는 살아있는 존재들을 캔버스 위에 배치하고, 그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아름다운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섬세한 조율의 예술입니다.
이제 당신의 믹스를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혹시 소리들이 너무 가깝게 붙어 서로를 불편하게 하고 있지는 않나요? 그들 사이에 숨 쉴 공간, 즉 '여백'을 선물해보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최고의 믹싱 엔지니어는 가장 많은 소리를 채워 넣는 사람이 아니라, 각 소리가 자신의 가장 멋진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가장 아름다운 침묵을 디자인해주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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