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소음'을 '이야기'로 다시 듣는 법
Sound Essay No.20
혹시 눈을 감고 지금 살고 있는 동네의 소리를 가만히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아마 온갖 소리들이 정신없이 뒤섞여 있을 겁니다. 자동차들이 뱉어내는 낮은 울음, 멀리서 들려오는 공사장의 메아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싸는 거대한 도시의 백색소음까지. 우리는 이 소리의 홍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느새 소리에 무뎌지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듣고 싶은 소리만 듣고, 나머지는 그저 '소음'이라는 이름의 벽 뒤로 밀어내 버리죠.
그런데 이 도시의 소리에는 사실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방금 이야기한, 도시의 삶 그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날것 그대로의 소리들입니다. 정겹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한, 도시의 솔직한 ‘민낯’ 같은 소리들이죠. 두 번째는 지하철 안내음이나 횡단보도 신호음처럼,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기능적인' 소리들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도시에서 이 두 소리가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겉돈다는 점입니다. 기능적인 소리들은 효율성만 추구할 뿐,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도시의 진짜 표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도시는 청각적으로 개성을 잃어버린,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익명의 공간이 되어갑니다. 이 글은 이 단절된 두 세계를 잇는 다리를 놓아보려 합니다. 도시의 진짜 목소리를 만드는 일은, 멋진 소리를 새로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수많은 속삭임 속에서 그 도시만의 매력적인 '말버릇'을 발견하고, 그것을 다정한 목소리로 다듬어주는 일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소리의 고고학자처럼, 도시의 숨은 이야기 찾기
모든 훌륭한 창작은 재료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시작됩니다. 도시의 목소리를 디자인하기 위한 귀한 재료는, 바로 우리가 소음이라 부르며 무시했던 도시의 진짜 소리들 속에 숨어있습니다.
'사운드마크(Soundmark)'란, 랜드마크가 눈에 보이는 상징이듯, 그 장소를 대표하는 귀에 잡히는 상징을 말합니다. 이건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든 소리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곳 사람들의 삶과 시간이 빚어낸 자연스러운 소리들입니다. 낡은 다리 위를 지나는 전철의 규칙적인 덜컹거림, 오래된 시장 골목에서만 들을 수 있는 상인들의 활기찬 대화, 특정 동네의 오래된 교회가 정오마다 울리는 종소리 같은 것들이죠.
이런 소리들은 단순한 소음이 아닙니다. 수십 년간 시민들의 일상이라는 직물에 짜인 씨실과 날실처럼, 그들의 집단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된 그 도시만의 '사투리'입니다. 따라서 도시의 목소리를 찾는 첫걸음은, 작곡이나 디자인이 아니라 ‘발견’과 ‘경청’이 되어야 합니다. 도시의 소리 탐험가가 되어 이어폰을 잠시 빼고 도시 곳곳을 걸어보는 겁니다. 그리고 질문하는 거죠. "이 소리는 왜 우리 마음을 끄는 걸까?", "이 소리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이 과정은 도시의 잊혔던 목소리를 발굴하고, 그 안에 담긴 시간의 결을 다시 느끼는, 일종의 '소리 고고학'과 같습니다.
그렇게 발굴한 도시의 진짜 소리, 즉 사운드마크라는 원석을 어떻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도시의 새로운 표정, '사운드 아이덴티티(Sound Identity)'로 다듬을 수 있을까요? 이는 마치 훌륭한 셰프가 그 지역의 신선한 제철 재료를 가지고 현대적인 요리를 만드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1단계: 재료의 맛 음미하기 (본질과 대화하기) 좋은 셰프는 재료를 보자마자 조리법부터 떠올리지 않습니다. 먼저 맛을 보고, 향을 맡으며 재료의 본질과 대화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오래된 사찰의 범종 소리를 '발견'했다면, "이건 종소리군" 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그 소리의 맛을 깊이 음미해보는 겁니다. 그 소리가 우리 마음에 평온함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처음 종을 쳤을 때의 맑은 타격음, 그 뒤를 이어 복잡하게 퍼져나가는 풍성한 배음, 그리고 모든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남는 깊고 부드러운 울림 때문일 겁니다. '평온함', '역사성', '깊이' 같은 감성적 키워드와 '맑은 어택', '긴 울림' 같은 음향적 특징이 바로 이 재료의 핵심적인 맛입니다.
2단계: 재료의 맛을 살려 요리하기 (현대적 추상화) 이제 그 재료의 맛을 살려 새로운 요리를 만들 차례입니다. 사찰의 범종 소리를 그대로 녹음해서 지하철 안내음으로 쓴다면, 마치 신선한 회를 갑자기 찌개에 넣는 것처럼 어색할 수 있습니다. 대신, 범종 소리가 가진 '평온하고 긴 울림'이라는 핵심적인 맛을 현대적인 사운드로 재해석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전자악기로 만들었지만 범종처럼 맑은 타격감과 풍성한 배음, 그리고 부드러운 여운을 가진 새로운 차임벨 사운드를 디자인하는 거죠. 이 새로운 소리는 과거의 소리를 흉내 낸 것이 아니라, 그 소리의 '영혼'을 계승한 완전히 새로운 창작물입니다.
3단계: 하나의 코스 요리처럼 내어놓기 (체계적 확장) 훌륭한 레스토랑은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코스 요리를 구성합니다. 도시의 사운드 아이덴티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창조된 핵심 사운드를 중심으로, 도시의 다양한 공간에서 하나의 통일된 청각 경험을 제공해야 합니다. 지하철에서는 핵심 멜로디 전체가 연주된다면, 버스의 하차 벨 소리는 그 멜로디의 일부 음계나 비슷한 악기 톤을 사용해 짧게 변주될 수 있습니다. 공공자전거의 알림음은 더 단순하고 경쾌한 형태로 적용되는 식이죠. 이 모든 소리들이 같은 '맛의 DNA'를 공유할 때, 도시 전체는 비로소 자신만의 개성 있는 목소리를 갖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도시의 목소리를 외부의 전문가가 만들어주는 세련된 로고 정도로만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우리 마음에 와닿는 도시의 소리는, 그 도시의 흙냄새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자라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습니다.
도시의 목소리를 만드는 과정은, 한 도시가 스스로의 과거(사운드마크)에 다정하게 말을 걸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신의 미래(사운드 아이덴티티)를 꿈꾸는 자기 성찰의 과정과 같습니다. 새로 만들어진 지하철 안내음이 낯선 소음이 아니라, 마치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도시. 버스에서 내릴 때 들리는 작은 멜로디가 왠지 모르게 반갑게 느껴지는 도시. 그런 도시는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찾은, 스스로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도시일 겁니다.
우리 도시의 목소리를 만드는 일은 전문가만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도시의 소리에 애정을 갖고 귀 기울이는 바로 그 순간, 도시의 새로운 목소리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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