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파이 힙합으로 읽는 와비사비의 미학
Sound Essay No.24
유튜브에 '공부할 때 듣는 음악'이나 '잠잘 때 듣는 음악'을 검색하면, 낡은 LP판이 돌아가는 썸네일과 함께 끝없이 이어지는 음악 채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로파이 힙합(Lo-fi Hip Hop)'이라 불리는 이 음악들의 특징은 한결같습니다. 살짝 지지직거리는 잡음, 일부러 뭉개놓은 듯한 피아노 소리, 그리고 칼같이 맞지 않는 느긋한 드럼 비트. 기술적으로 본다면 결코 '좋은' 음질이라고 할 수 없죠.
그런데 왜 우리는 이토록 '낡고' '불완전한' 소리를 들으며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끼는 걸까요? 사실 이 매력적인 스타일은 누군가 "자, 오늘부터 이런 음악을 만들어보자!"라고 의도해서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과거의 음악가들이 가졌던 '기술적 한계'와 '결핍'이라는 불편한 상황 속에서 우연히 피어난 스타일에 가깝습니다.
이 글은 로파이 힙합이라는 현상을 통해, 기술의 한계가 어떻게 창의성과 만나 새로운 미학을 탄생시켰는지 추적해 보는 시간 여행입니다. 완벽하지 않은 도구를 가지고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려 했던 창작자들의 이야기는, '와비사비'의 아름다움이 어떻게 우리 곁에 스며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흥미로운 증거가 될 것입니다.
힙합 음악의 황금기였던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프로듀서들에게 가장 중요한 악기는 바로 '샘플러(Sampler)'였습니다. 오래된 LP판에서 마음에 드는 소리를 잘라내어 새로운 비트를 만드는 마법 상자였죠. 하지만 당시의 샘플러는 지금처럼 무한대의 용량을 가진 컴퓨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샘플을 저장할 수 있는 시간은 단 몇 초에 불과했고, 음질도 12비트 수준으로 지금 기준으로는 굉장히 거칠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결핍'이 독창성을 낳았습니다. 프로듀서들은 몇 초 안 되는 샘플 시간에 더 긴 소리를 담기 위해 기발한 편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33회전 LP판을 45회전으로 빠르게 돌려 샘플링한 뒤, 샘플러 안에서 다시 속도를 늦춰 원래의 음높이로 되돌리는 식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소리는 원래의 빠르기로 돌아왔지만, 음질은 어딘가 모르게 거칠고 투박하게 변했습니다. 전문 용어로는 '에일리어싱(Aliasing)'이라 불리는, 일종의 디지털 오류였습니다. 기술적으로는 분명 '음질 저하'였지만, DJ 프리미어나 제이딜라 같은 전설적인 프로듀서들은 이 '거친 입자감'을 자신들의 시그니처 사운드로 승화시켰습니다. 이 투박한 질감은 드럼 소리를 한층 더 묵직하고 힘 있게 만들었고, 멜로디 샘플에는 아련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더해주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진 것이 부족한 상황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 와비사비의 '와비(侘)', 즉 소박하고 꾸밈없는 멋의 탄생이었습니다.
수많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과 힙합 프로듀서들의 작업실에는 값비싼 스튜디오 장비 대신, 'TASCAM 4 트랙' 같은 카세트테이프 녹음기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카세트테이프는 저렴하고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었지만, 기술적으로는 많은 단점을 가졌습니다. 소리의 고음역대는 살짝 뭉개져 답답하게 들렸고, '히스(Hiss)'라는 '쉬이익'하는 배경 소음이 항상 따라다녔죠.
하지만 이 '불편함'이 역설적으로 따뜻한 감성을 만들어냈습니다.
뭉툭해서 더 편안한 소리: 고음역대가 살짝 깎여나간 소리는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워서 오래 들어도 귀가 피로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밝은 형광등 불빛 대신, 아늑한 백열등 불빛 아래 있는 듯한 편안함을 주었죠.
따뜻한 압축감: 카세트테이프에 소리를 조금 크게 녹음하면, 테이프가 그 소리를 다 감당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찌그러지며 압축되는 '새츄레이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 효과는 비싼 스튜디오 장비 없이도 드럼과 베이스를 끈끈하게 묶어주고, 소리 전체에 기분 좋은 온기를 더해주는 마법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배경 소음의 위로: '히스' 노이즈는 단순히 잡음이 아니었습니다. 텅 빈 침묵을 아늑한 공기로 채워주며, 듣는 이에게 안정감을 주는 '소리의 담요'와도 같았습니다.
이처럼 카세트테이프라는 매체가 가진 기술적 한계와 낡음은, 시간이 흐르며 그윽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와비사비의 '사비(寂)'의 미학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제 다시 현재로 돌아와 봅시다. 지금 우리에겐 기술적 한계가 거의 없습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깨끗하고 완벽한 소리를 만들 수 있죠.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욱더, 그 낡은 소리들을 찾아 헤매는 걸까요?
오늘날의 로파이 힙합 프로듀서들은 과거의 '한계'를 '스타일'로써 의도적으로 선택합니다. 최신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도, 일부러 플러그인을 사용해 LP 잡음을 섞고, 테이프처럼 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게 만들며, 옛날 샘플러처럼 음질을 거칠게 깎아냅니다.
과거에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던 결점들이, 이제는 현대 사회의 불안함과 디지털의 차가움으로부터 우리를 위로해 주는 가장 중요한 '감성적 장치'가 된 것입니다. 로파이 힙합의 와비사비 미학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조금은 흔들리고, 조금은 낡았어도, 그게 바로 너의 매력이야."라고 말이죠. 기술적 한계에서 태어난 스타일이,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는 하나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로파이 힙합의 역사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창의성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가장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스타일은 종종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가 아니라, 명백한 '한계' 속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가진 것이 부족했기에 더 기발한 방법을 고민해야 했고, 도구가 불완전했기에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결과가 탄생했습니다.
어쩌면 창의성이란, 완벽한 도구를 손에 쥐는 능력이 아니라, 내 손에 쥔 불완전한 도구를 어떻게 사랑하고 그것과 함께 춤을 출 것인가에 대한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기술의 한계 속에서 피어난 와비사비의 미학처럼, 어쩌면 지금 내가 가진 결핍과 한계야말로, 나만의 가장 아름다운 스타일을 만들어낼 가장 소중한 시작점일 수 있습니다.
https://linktr.ee/soundfoundrynco
https://blog.naver.com/soundfoundrynco/224000026690
https://www.instagram.com/jun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