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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에 '아름다운 흠집' 새기는 법

: 디지털 시대의 와비사비 창작 가이드

by JUNSE

Sound Essay No.23

와비사비(侘寂)의 미학 II - 소리에 '아름다운 흠집' 새기는 법

: 디지털 시대의 와비사비 창작 가이드



alexander-gluschenko-8cFL-i2yKEQ-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Alexander Gluschenko


내 음악은 왜 이렇게 차가울까?


늦은 밤, 헤드폰을 쓰고 오늘 하루 종일 만진 음악을 들어봅니다. 소리 하나하나는 수정처럼 맑고, 박자는 컴퓨터처럼 정확한데... 어쩐지 가슴이 뛰지 않습니다. 마치 너무 잘 꾸며진 모델하우스에 들어온 기분이랄까요? 모든 게 제자리에 있지만, 사람 사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그런 느낌. 우리는 완벽함을 추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영혼 없는 소리만 남은 것 같아 공허해집니다.


많은 창작자들이 이 '아름다운 감옥'에 갇히곤 합니다. 기술의 발전 덕분에 우리는 이제 소리의 모든 결점을 지워버릴 수 있게 되었지만, 바로 그 과정에서 소리가 가진 고유의 매력, 즉 '인간적인 흔적'까지 함께 지워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곤 하죠.


이 글은 이 딜레마에 대한 조금 다른 해답을 '와비사비(侘寂)'라는 오래된 지혜에서 찾아보려는 시도입니다. 와비사비를 그저 어려운 철학이 아니라, 우리의 디지털 작업실에 따뜻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아주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창작 도구 모음'으로 다시 한번 살펴보려 합니다. 딱딱한 이론 대신, 지금 당장 우리가 시도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통해 '사비(寂)', 즉 세월의 깊이를 더하는 법과 '와비(侘)', 즉 사람의 숨결을 불어넣는 법을 탐구할 것입니다. 당신의 차가운 디지털 사운드를, 만져질 듯 온기가 느껴지는 살아있는 소리로 바꾸는 여정을 함께 시작하겠습니다.



'사비(寂)'의 철학 - 당신의 소리에 '과거'를 선물하는 법


sean-benesh-zUPSyHib3UA-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Sean Benesh


'사비'란 오래된 것들이 품고 있는 시간의 흔적과 그윽한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마치 잘 닦인 오래된 가구에서 느껴지는 윤기처럼 말이죠. 갓 태어난 당신의 디지털 사운드에 이 깊이 있는 '과거'를 선물하기 위해, 우리는 아날로그 시대가 남긴 아름다운 흔적들을 빌려올 수 있습니다.


테이프의 마법을 빌려서, 소리에 숨결을 요즘 우리가 듣는 음악은 대부분 컴퓨터 하드디스크라는, 차갑고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카세트테이프나 릴 테이프라는 물리적인 기록 장치에 소리를 담았죠. 이 테이프라는 매체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모터는 아주 미세하게 흔들려서 소리를 살짝 떨리게 만들었고(와우 & 플러터), 테이프 자체에는 '쉬이익'하는 특유의 잡음(히스)이 있었어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바로 이 결점들이 소리에 따뜻한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테이프에 소리를 녹음할 때 생기는 '새츄레이션(Saturation)' 효과는, 마치 날카로운 소리의 모서리를 사포로 부드럽게 갈아주는 것과 같습니다. 귀에 거슬리던 디지털의 날카로움이 둥글게 다듬어지고, 그 자리에 기분 좋은 온기가 스며들죠. 테이프의 미세한 속도 변화는 완벽하게 고정된 소리에 마치 사람의 목소리처럼 자연스러운 떨림을 더해, 소리가 살아 숨 쉬게 만듭니다. '히스' 노이즈는 어떨까요? 이건 단순한 잡음이라기보다, 음악이 그려질 '소리의 캔버스'가 가진 고유한 질감에 가깝습니다.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디지털의 침묵 대신,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는 배경을 만들어주는 셈이죠.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플러그인을 통해 이 테이프의 다정한 마법을 손쉽게 빌려올 수 있습니다.


진공관의 온기를 머금게, 소리를 풍성하게 오래된 진공관 앰프에 소리를 통과시키면, 소리는 단순히 커지는 것을 넘어 훨씬 더 풍성하고 따뜻해집니다. 이는 마치 소리의 조명 디자이너와 같습니다. 그냥 밝기만 한 형광등 불빛이 아니라, 공간의 분위기를 아늑하게 만들어주는 따뜻한 오렌지색 조명을 비춰주는 거죠. 진공관은 소리에 기분 좋은 '배음'이라는 색채를 더해, 밋밋하고 평면적이던 소리를 훨씬 입체적이고 밀도 있게 만들어줍니다. 차갑던 소리가 비로소 온기를 품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주죠.


바이닐의 인격을 덧입혀, 이야기를 만들다 LP판에서 들려오는 '타닥'거리는 잡음은, 오래된 책에서 나는 희미한 종이 냄새와 같습니다. 그 냄새가 책의 내용을 바꾸지는 않지만, 우리가 그 책을 경험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죠. LP의 잡음은 우리에게 "이 음악은 데이터가 아니라, 한때 누군가의 방에서 실제로 돌아가던 진짜 물건이었어"라고 말을 걸어옵니다. 의도적으로 약간의 바이닐 노이즈를 더하는 것은, 당신의 음악에 고유한 '인격'과 '이야기'를 덧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깨끗하기만 한 새 옷이 아니라, 멋지게 바랜 빈티지 재킷처럼 말이죠.



'와비(侘)'의 철학 - 당신의 소리에 '사람의 흔적'을 불어넣는 법


jonathan-castaneda-9A4-TZSpL18-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Jonathan Castañeda


'와비'는 꾸밈없고 소박하며, 완벽하지 않기에 더 아름다운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흔적'과 깊이 연결되어 있죠. 우리의 디지털 작업물에 이 따뜻한 사람의 숨결을 불어넣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네모 반듯한 그리드에서 한 발짝 벗어나기 컴퓨터 음악의 '그리드'는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고마운 지도이지만, 때로는 우리를 네모 반듯한 감옥에 가두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완벽한 네모칸 안에 갇히는 걸 좋아하게 됐을까요? 세상 어떤 드러머도 컴퓨터처럼 완벽하게 연주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미세하게 당기고 미는 '엇박'이 바로 심장을 뛰게 하는 '그루브'를 만들어냅니다. 심장 박동이 완벽하게 규칙적이지 않은 것처럼, 살아있는 리듬은 언제나 미세하게 흔들립니다. MIDI 노트를 찍을 때, 모든 음을 칼같이 그리드에 맞추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보세요. 의도적으로 몇몇 음들을 살짝 뒤로 밀거나 앞으로 당겨보는 겁니다. 당신의 귀를 믿고, 리듬이 가장 자연스럽게 '춤추는' 지점을 찾아보세요. 그것은 박자를 틀리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리듬에 '표정'을 만들어주는 섬세한 작업입니다.


음정의 아름다운 흔들림을 허용하기 음정 보정 기술은 정말 훌륭하지만, 과하면 독이 됩니다. 노래방 기계처럼 모든 음정을 완벽하게 맞추는 순간, 노래는 감정을 잃고 맙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가장 마음을 울렸던 노래의 한 구절은, 종종 가장 완벽한 음정이 아니라 가장 진실한 감정이 실린, 그래서 살짝 떨리거나 불안정했던 바로 그 음정일 때가 많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는 원래 흔들립니다. 빈티지 아날로그 신시사이저의 소리가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도 그 미세한 피치의 불안정성 때문이죠. 모든 것을 완벽하게 튜닝하려는 완벽주의에서 벗어나, 약간의 '음정의 흔들림'을 허용할 때, 당신의 음악은 비로소 진실한 목소리를 얻게 됩니다.


행복한 실수를 껴안는 용기 당신이 방에서 어쿠스틱 기타를 녹음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가장 마음에 드는 연주를 마친 순간, 창밖에서 희미하게 새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당신의 첫 반응은 아마 "아, 망했다. 다시 해야지" 일 겁니다. 하지만 다시 녹음하기 전에, 딱 한 번만 그 '실수'를 품고 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그 우연히 들어온 새소리가, 당신의 기타 연주와 만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솔직한 순간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릅니다. 녹음 과정에서 생긴 작은 실수, 예를 들어 기타 줄에 손가락이 스치는 소리, 감정이 격해져 살짝 갈라진 목소리 같은 것들은 지워야 할 결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음악이 '진짜 공간'에서 '진짜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정성'의 도장입니다. 깨끗함보다 개성을, 완벽함보다 진심을 선택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름다운 불완전함'을 향한 디자인

declan-sun-OspMUpCBeqQ-unsplash (1).jpg 사진: Unsplash의Declan Sun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태도'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비'의 기법들은 당신의 소리에 깊이 있는 '역사'를 선물하고, '와비'의 기법들은 살아있는 '숨결'을 불어넣어 줍니다. 이것은 단순히 소리를 낡고 오래된 것처럼 꾸미는 '빈티지 흉내'와는 다릅니다. 현대의 기술을 사용하되, 오래된 지혜를 빌려와 인간적 흠집의 결청체인 새로운 아름다움(시대정신)을 발산하는 일이죠.


누구나 버튼 하나로 그럴듯한 기술적 완벽함을 얻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당신의 진정한 예술성은,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아름다운 불완전함'을 남겨둘 것인지를 선택하는 그 지점에서 빛을 발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완벽한 소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지만 '인간적인' 소리를 만드는 것일 테니까요. 오늘, 당신의 소리에 어떤 인간적인 흠집을 사랑스럽게 새겨 넣어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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