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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버스가 ASMR 공간이라면?

시끄러운 출퇴근길을 바꾸는 소리 디자인 상상 실험

by JUNSE

생각 스케치 No.4

지하철/버스가 ASMR 공간이라면?

시끄러운 출퇴근길을 바꾸는 소리 디자인 상상 실험


ian-lu-HF9WtHWy9cM-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Ian Lu

우리의 하루는 종종 소리 전쟁 속에서 시작됩니다. 특히 아침저녁 출퇴근길의 대중교통 안은 그렇죠. 열차가 끼익- 멈춰 서는 날카로운 소리, 출입문이 닫힐 때 울리는 경고음, 다음 역을 알리는 딱딱한 안내 방송, 여기저기서 울리는 스마트폰 알림음과 사람들의 통화 소리까지. 우리는 이 소리의 폭격 속에서 귀를 막거나 이어폰 볼륨을 높이며 하루의 에너지를 소진하곤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피로감을 유발하는 소음 대신, 우리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소리가 그 공간을 채운다면 어떨까요? 몇 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정감을 선사하며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된 ASMR(자율 감각 쾌감 반응)의 원리를 대중교통 소리 환경에 조심스럽게 적용해보는 상상을 해보는 겁니다. 물론, "지하철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한번, 유쾌한 상상 실험을 시작해보죠.



불협화음 오케스트라 vs 안전 신호 속삭임


대중교통 소음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유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소리가 '크다'는 것만이 문제는 아닐 겁니다. 예측 불가능하게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소리, 의미 없이 반복되는 기계음, 여러 소리가 뒤섞여 만드는 혼란스러움. 이런 것들이 우리의 신경을 더 곤두서게 만들죠. 마치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조율되지 않은 오케스트라 속에 갇힌 기분이랄까요.


Woman-scratching-with-nails-to-make-ASMR-sounds.jpg 출처 : www.psypost.org 'PsyPost: What is the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ASMR이 우리에게 주는 편안함은 정반대의 지점에 있습니다. 속삭임, 부드러운 마찰음, 반복적인 두드림 같은 ASMR의 소리들은 대부분 예측 가능하고, 부드러우며, 일정한 패턴을 가집니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듯, 이런 소리들은 우리 뇌의 원초적인 부분에 "안전하다", "돌봄받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 스트레스를 낮추고 이완 상태를 유도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연구들을 보면 ASMR이 심박수를 낮추는 등 생리적인 이완 효과를 유발한다는 결과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ASMR의 이완 효과에 대한 체계적 문헌 검토 관련 기사는 PsyPost: What is the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ASMR의 '마음 진정 효과'를 대중교통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어떻게 빌려올 수 있을까요?



속삭이는 안내 방송과 톡톡 두드리는 출입문 소리?

liam-burnett-blue--qwEUsg7UbI-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Liam Burnett-Blue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건 안내 방송의 변화입니다. 지금의 딱딱하고 큰 목소리 대신, 차분하고 부드러운 톤, 혹은 ASMR 아티스트처럼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이번 역은...", "출입문 닫힙니다"라고 안내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매일 듣는 목소리가 조금 더 다정하게 느껴진다면, 짜증스러운 아침 출근길이 조금은 부드러워지지 않을까요?


물론 여기서 현실적인 고민이 바로 튀어나옵니다. "속삭이는 소리가 시끄러운 지하철 안에서 제대로 들릴까?", "긴급 상황을 알릴 때도 속삭이면 어떡해?" 맞습니다. 모든 안내 방송을 속삭임으로 바꿀 수는 없을 겁니다. 정보 전달의 명확성과 안전 확보는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일상적인 안내 방송의 '톤앤매너'를 지금보다 훨씬 더 차분하고 안정적으로 디자인하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마치 잘 만들어진 명상 앱의 안내 목소리처럼 말입니다.


다음으로 기계적인 소음 자체를 바꿔보는 상상입니다. 출입문이 닫힐 때 울리는 '삑-' 소리 대신, 나무 블록을 가볍게 '톡' 두드리는 소리나 부드러운 차임벨 소리가 난다면? 열차가 역에 도착할 때 끼익- 마찰하는 소리 대신,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쉬이익-' 하는 소리로 대체된다면? 물론 이것 역시 기술적인 어려움과 안전 규정이라는 현실적인 벽에 부딪힐 겁니다. 모든 기계 소음을 없앨 수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겠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소음들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더 나은 소리로 바꿀 수는 없을까?" 라고 질문을 던져보는 태도 그 자체입니다.



소음을 바꾸는 대신, 부드럽게 감싸 안기

더 현실적인 접근 방식은, 기존의 소음을 완전히 바꾸는 대신 '긍정적인 소리로 부드럽게 감싸는(Sound Masking)'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ASMR 콘텐츠 중에도 특정 트리거 소리 외에도, 빗소리나 모닥불 소리 같은 편안한 배경 소음이 계속 깔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소리들은 신경 쓰이는 다른 소음들을 가려주면서 동시에 안정감을 주죠.


이 원리를 대중교통에 적용해보는 겁니다. 열차나 버스 내부에 아주 낮은 볼륨으로, 거의 의식하기 힘들 정도로,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부드러운 소리 (예: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멀리서 들리는 계곡 물소리)나 기분 좋은 백색소음을 재생하는 거죠. 이 소리들은 다른 승객의 통화 소리나 외부의 거슬리는 소음들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겠지만, 그 소리들의 날카로움을 부드럽게 중화시켜 전체적인 소리 환경을 훨씬 더 쾌적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마치 소란스러운 카페에 잔잔한 배경음악이 깔리면 대화 소리가 덜 거슬리게 느껴지는 것처럼요.

largepreview.png www.researchgate.net


실제로, 개방형 사무실과 같은 소음 환경에서 사운드스케이프 요소(Soundscape Elements), 특히 자연의 소리가 사람들의 심리적 회복감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실험 연구 결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물소리나 새소리와 같은 자연 음향 요소가 인공적인 사무실 소음 환경에서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기분을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An Experimental Study: The Restorative Effect of Soundscape Elements in a Simulated Open-Plan Office, ResearchGate 논문 링크). 이러한 원리가 대중교통 환경에서도 승객의 심리적 안정감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탐색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현실의 벽 앞에서, 그래도 던져보는 질문


mark-konig-OBPLW16Lp_4-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Mark König


물론 이 모든 상상에는 "그래서 현실적으로 가능해?"라는 큰 물음표가 따라붙습니다. 앞서 말했듯 안전 문제(경고음은 확실히 들려야 합니다!), 기술 구현의 어려움과 비용, 그리고 소리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누군가에게는 팅글이, 누군가에게는 소음일 수 있죠!)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어쩌면 대중교통이라는 공공 공간에 ASMR의 원리를 직접 적용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거나, 영원히 불가능한 아이디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스케치의 진짜 목적은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불편한 소리 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어쩌면 다르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질문을 던져보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ASMR이라는, 전혀 다른 맥락의 아이디어를 빌려와 우리의 생각의 폭을 조금 더 넓혀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공간의 '소리'가 조금 더 우리를 배려하도록 디자인될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더 평화로워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기술적인 문제 이전에, 우리가 소리를 얼마나 중요한 환경 요소로 인식하고 있는지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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