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디오 콘텐츠에 '향기의 레이어'가 있다면?

향수 조향 기법으로 다시 듣는 팟캐스트 & 오디오북 사운드 디자인

by JUNSE

생각 스케치 No.3

오디오 콘텐츠에 '향기의 레이어'가 있다면?

향수 조향 기법으로 다시 듣는 팟캐스트 & 오디오북 사운드 디자인


좋은 향수는 단순히 좋은 향기 하나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뿌리는 순간 느껴지는 상큼한 탑 노트(Top Note), 시간이 조금 지나 은은하게 퍼지는 미들 노트(Middle Note),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아 잔향을 만드는 베이스 노트(Base Note). 이 서로 다른 향의 '레이어(Layer)'들이 시간에 따라 조화롭게 변화하며 하나의 깊고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죠. 조향사는 마치 작곡가처럼, 각 향료의 특성과 휘발성을 계산하여 이 섬세한 향기의 교향곡을 디자인합니다. (향수의 노트 개념에 대한 설명은 퍼퓸 소사이어티 같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우리의 귀로 듣는 이야기의 세계, 팟캐스트나 오디오북을 생각해봅시다. 진행자의 목소리, 배경음악, 효과음. 이 소리들도 어쩌면 향수처럼 여러 개의 '레이어'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 소리의 레이어들을 향수처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노트'의 개념으로 의도적으로 디자인한다면 어떨까요?



귀로 '맡는' 이야기: 사운드 노트의 가능성

content-pixie-KTWKXxfn1sQ-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Content Pixie


향수의 탑-미들-베이스 노트처럼, 오디오 콘텐츠의 사운드에도 시간적 구조와 역할에 따른 '사운드 노트'를 적용해보는 상상입니다.


사운드 탑 노트: 이야기의 첫인상 (시작 ~ 5분) 팟캐스트나 오디오북의 시작 부분. 청취자의 귀를 사로잡고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역할입니다. 향수의 탑 노트가 상큼한 시트러스나 가벼운 플로럴 향으로 첫인상을 결정짓듯, 사운드 탑 노트는 경쾌한 시그널 음악, 흥미를 유발하는 짧은 예고편, 혹은 진행자의 친근하고 활기찬 첫인사 등으로 구성될 수 있습니다. 너무 무겁거나 복잡하지 않게,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운드 미들 노트: 이야기의 심장 (본론) 콘텐츠의 핵심 내용이 펼쳐지는 가장 긴 구간입니다. 향수의 미들 노트가 풍성한 플로럴이나 스파이시한 향으로 향수의 '주제'를 드러내듯, 사운드 미들 노트는 진행자의 목소리 톤, 내용의 흐름에 맞는 배경음악의 미묘한 변화, 이해를 돕는 적절한 효과음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이야기의 깊이와 몰입감을 더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각각의 소리 요소들이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라는 중심 주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조화'입니다. 예를 들어, 긴장감 넘치는 부분을 이야기할 때는 배경음악의 템포를 살짝 높이거나 낮은 주파수의 드론 사운드를 추가하고, 감성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을 배경에 옅게 까는 식으로, 내용에 따라 소리의 '온도'와 '질감'을 섬세하게 조절하는 것이죠.


사운드 베이스 노트: 남겨지는 여운 (마무리 ~ 끝)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청취자에게 남는 마지막 인상입니다. 향수의 베이스 노트가 우디(Woody)나 머스크(Musk) 계열의 깊고 따뜻한 향으로 긴 여운을 남기듯, 사운드 베이스 노트는 차분한 마무리 음악, 진행자의 진심 어린 끝인사, 혹은 잠시 동안의 고요한 침묵 등을 통해 청취자가 들었던 내용을 곱씹고 감정적인 여운을 느낄 수 있도록 돕습니다. 다음 에피소드에 대한 기대감을 살짝 남기는 것도 좋겠죠.



조향사처럼 소리를 디자인한다는 것

vimal-s-M6IOL-9hDE0-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Vimal S


이러한 '사운드 노트'의 관점은 오디오 콘텐츠를 만드는 우리에게 몇 가지 새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시간의 흐름을 디자인하다: 우리는 종종 오디오 콘텐츠의 사운드를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톤앤매너로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향수처럼, 시간에 따라 소리의 구성과 느낌이 미묘하게 변화한다면 청취자는 지루함을 덜 느끼고 이야기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지 않을까요? 마치 잘 짜인 영화의 사운드트랙처럼,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감정선을 함께 그려나가는 '시간적 디자인'의 중요성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블렌딩'의 기술: 훌륭한 조향사는 수십, 수백 가지의 향료를 조화롭게 섞어 완전히 새로운 향을 창조합니다. 오디오 콘텐츠 역시 목소리, 음악, 효과음, 침묵이라는 여러 '향료'들을 어떻게 섬세하게 '블렌딩'하느냐에 따라 그 품격과 깊이가 달라집니다. 어떤 소리를 강조하고 어떤 소리를 배경으로 물릴 것인지, 각 소리의 볼륨과 질감, 공간감을 어떻게 조절하여 서로 아름답게 어우러지게 할 것인지. 이는 기술적인 믹싱을 넘어, 마치 조향사의 후각처럼 섬세한 '청각적 감각'을 요구하는 예술의 영역일 수 있습니다. (오디오 후반 작업에서의 섬세한 믹싱과 마스터링의 중요성은 iZotope 블로그 같은 전문 자료들에서도 강조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배려: 좋은 향수는 뿌린 사람뿐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도 기분 좋은 경험을 선사합니다. 좋은 오디오 콘텐츠의 사운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청취자가 오랜 시간 들어도 피로하지 않도록 음역대의 밸런스를 맞추고, 불필요한 소음을 제거하며,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효과음을 절제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청취자를 향한 깊은 '배려'의 표현입니다.


물론 모든 팟캐스트나 오디오북이 복잡한 사운드 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진행자의 진솔한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죠. 하지만 우리가 소리를 단순히 '배경'이나 '효과'로만 생각하는 대신, 향수처럼 시간에 따라 변화하고 여러 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하나의 '작품'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cowomen-QziaoZM0M44-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CoWomen

어쩌면 우리가 만드는 오디오 콘텐츠는, 청취자의 귀에 뿌려지는 보이지 않는 '향수'와 같을지도 모릅니다. 그 향기가 얼마나 오래도록, 그리고 얼마나 아름답게 기억될지는, 우리가 소리의 레이어를 얼마나 섬세하게 디자인하느냐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여섯 번째 스케치북 페이지는 이렇게, 향기로운 질문을 남기며 마무리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알림음, '더 정제되고, 더 좋게' 디자인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