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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 디스토션이 '마이야르 반응'이라면?

스테이크 굽기에서 배우는 '음향적 쿠킹'의 미학

by JUNSE

생각 스케치 No.10

사운드 디스토션이 '마이야르 반응'이라면?

스테이크 굽기에서 배우는 '음향적 쿠킹'의 미학

emerson-vieira-_aR4l6fj6wQ-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Emerson Vieira

사운드 디자이너나 뮤지션에게 '디스토션(Distortion, 왜곡)'은 종종 양날의 검처럼 여겨집니다. 소리를 망가뜨리는 주범, 즉 '잡음'이나 '오류'로 취급받기도 하고, 때로는 기타 소리에 힘을 더하는 '효과'로 사용되기도 하죠. 우리는 종종 이 '왜곡'을 기술적인 결함이나 인위적인 이펙터 정도로만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디스토션을 '요리'의 과정, 특히 '마이야르 반응(Maillard Reaction)'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마이야르 반응은 스테이크를 뜨거운 팬에 구울 때, 혹은 빵을 오븐에 구울 때 일어나는 마법 같은 화학 작용입니다. 아미노산과 당이 만나면서, 날것의 재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수백 가지의 복합적인 맛과 향('풍미'),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갈색 빛깔이 폭발적으로 생성되는 과정이죠. (마이야르 반응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Serious Eats 같은 요리 과학 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태우는' 것이 아니라, 재료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창조적인 변형'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의 스케치가 시작됩니다. 만약 오디오 디스토션을 '소리의 손상'이 아니라, 날것의 소리에 복합적인 풍미와 감칠맛, 따뜻한 질감을 더하는 '음향적 쿠킹' 과정으로 접근해본다면 어떨까요?



날것의 사운드(Raw) vs 잘 익은 사운드(Cooked)

A-raw-waveform-of-audio-signal.png www.researchgate.net/


디지털 녹음 기술(DAW)은 우리에게 원본 그대로의, 아주 깨끗하고 선명한 '날것'의 소리를 선물했습니다. 하지만 때로 이 소리는 너무 차갑고 밋밋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잘 삶기만 한 고기처럼, 영양가는 있지만 '맛'은 부족한 상태랄까요.


반면, 진공관 앰프나 아날로그 테이프 머신을 통과한 소리는 왜 더 '따뜻하고' '풍성하게' 들릴까요? 바로 그 과정에서 우리가 '디스토션'이라고 부르는 미세한 왜곡과 배음(Harmonics)이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리의 '마이야르 반응'입니다!


소리의 '감칠맛'을 더하는 배음(Harmonics): 디스토션은 원본 소리에는 없던 새로운 주파수 성분, 즉 '배음'을 추가합니다. 이는 마치 스테이크에 감칠맛(Umami)을 더하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새츄레이션(Saturation)'이라 불리는 부드러운 디스토션은, 소리의 짝수 배음을 풍성하게 만들어 소리를 더 따뜻하고 둥글게, 그리고 꽉 차게 만들어줍니다. 차갑고 평면적이던 소리가 비로소 입체감과 '맛'을 갖게 되는 것이죠.


소리의 '바삭함'을 살리는 질감(Texture): 디스토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소리의 '질감'은 극적으로 변합니다. 약한 불(낮은 게인)로 은은하게 익히면 부드럽고 따뜻한 질감이, 강한 불(높은 게인)로 확 익히면(퍼즈, Fuzz) 거칠고 바삭바삭한 질감이 만들어집니다. 기타리스트가 디스토션 페달을 밟는 순간, 소리는 단순히 시끄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맹렬하게 타오르는 듯한 '질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음향적 쿠킹'을 위한 레시피

ritupon-baishya-HkqFGB7T2g0-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Ritupon Baishya

셰프가 불 조절과 조리 시간을 통해 마이야르 반응을 제어하듯, 사운드 디자이너 역시 다양한 '열원(디스토션 툴)'을 사용하여 소리를 '요리'할 수 있습니다.


아날로그 테이프의 '수비드(Sous-vide)' 효과: 아날로그 테이프에 소리를 녹음할 때 생기는 새츄레이션은, 마치 수비드 요리처럼 소리 전체를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익히는 것과 같습니다. 날카로운 피크(Peak)를 부드럽게 깎아주고, 전체적인 소리(다이내믹 레인지)를 은근하게 압축시켜, 듣기 편안하면서도 밀도감 있는 따뜻한 결과물을 만들어냅니다.


진공관 앰프의 '그릴링(Grilling)' 효과: 진공관(Tube) 앰프를 통과한 소리는 특유의 따뜻하고 풍성한 배음을 얻게 됩니다. 이는 마치 스테이크에 불맛을 입히는 그릴링과 같습니다. 소리의 원재료 맛은 살리면서도, 그 위에 훈연 향처럼 매력적인 '색채'를 더해주는 것이죠.


디지털 디스토션의 '브루잉(Brûlée)' 효과: 비트크러셔(Bitcrusher)처럼 의도적으로 소리를 깨뜨리는 디지털 디스토션은, 마치 크렘 브륄레 표면의 설탕을 토치로 태워 단단한 캐러멜 층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원본 소리를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변형'시켜, 차갑고 디지털적인, 혹은 로파이(Lo-fi)한 새로운 질감을 창조해내는 과감한 요리법입니다.



'깨끗함'을 넘어 '풍미'를 디자인하다

techivation-tnwCBVYsTU4-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Techivation

이러한 '음향적 쿠킹'의 관점은, 소리를 다루는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태도를 제안할까요?


'완벽한 복원'에서 '창의적 변형'으로: 우리의 목표가 항상 원본 소리를 깨끗하고 완벽하게(Hi-Fi) 보존하는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셰프가 재료를 과감하게 태우고 변형시켜 새로운 맛을 창조하듯, 우리도 소리를 의도적으로 '왜곡'시켜 더 흥미롭고 풍부한 감성적 '풍미'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디스토션은 '실수'가 아닌 '도구'다: 디지털 환경에서 빨간색 '클리핑(Clipping)' 경고등은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깨짐'의 순간을 통제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소리에 힘과 개성을 더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현대 EDM이나 힙합 프로듀서들은 의도적으로 클리핑을 활용하여 강력한 사운드를 만듭니다.)


소리의 '감칠맛' 이해하기: 왜 어떤 소리는 밋밋하고, 어떤 소리는 귀에 착 감길까요? 그 차이는 종종 이 '배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성분에 있습니다. 마이야르 반응을 이해하는 셰프가 더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듯, 디스토션과 배음의 원리를 이해하는 사운드 디자이너는 더 매력적이고 풍부한 소리를 빚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재료를 강한 불에 익힐 필요는 없듯, 모든 소리에 디스토션을 걸 필요는 없을 겁니다. 때로는 날것 그대로의 신선함이 가장 중요할 때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스케치를 통해 우리는 '왜곡'이라는 단어가 가진 부정적인 편견에서 잠시 벗어나 볼 수 있습니다. 디스토션은 소리의 파괴가 아니라, 어쩌면 소리의 잠재력을 깨우는 가장 창의적인 '요리법'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날것'의 소리, 오늘은 어떤 레시피로 '쿠킹'해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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