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음악이 '숙성'된다면 어떨까요?

'슬로우 리스닝'의 가치로 본 디지털 음악 감상의 미래

by JUNSE

생각 스케치 No.11

음악이 '숙성'된다면 어떨까요?

'슬로우 리스닝'의 가치로 본 디지털 음악 감상의 미래

ben-hope-ybr3k6fBuO8-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Ben Hope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쉽게 음악을 소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스트리밍 플랫폼은 버튼 하나로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음악에 즉시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죠. 하지만 이 놀라운 편리함은 동시에 '음악 감상'의 무게를 극도로 가볍게 만들었습니다. 알고리즘은 쉴 새 없이 새로운 음악을 추천하고, 우리의 손가락은 조금이라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다음 곡' 버튼(Skip) 위를 바쁘게 움직입니다.


이러한 '즉시성(Immediacy)'의 문화 속에서, 음악은 종종 한 번 듣고 버려지는 '패스트푸드'처럼 소비됩니다. 앨범 전체의 서사를 음미하기보다, 후렴구(Hook)의 자극적인 부분만 골라 듣는 '스낵 컬처'가 보편화되었죠. (스트리밍이 우리의 청취 습관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다양한 매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와 정반대의 경험을 디자인해본다면 어떨까요? 잘 만든 와인이나 위스키, 치즈가 '숙성(Aging)'이라는 시간의 세례를 통해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복합적인 풍미와 깊이를 얻게 되는 것처럼, 만약 우리의 음악 감상 경험에 '시간'과 '기다림'이라는 가치를 의도적으로 부여한다면 말입니다.



'숙성'의 미학: 기다림은 어떻게 경험의 가치를 높이는가

liv-kao-sUVkWV4ruR8-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Eutah Mizushima

우리는 왜 숙성된 와인 한 병에 기꺼이 높은 비용을 지불할까요? 그것은 단순히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재료 본연의 특성이 화학적으로 변모하고, 복잡한 3차 향(Tertiary Aromas)이 피어나는 등, 시간이 아니면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독특한 '복합성(Complexity)'과 '이야기(Story)'를 품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기다림'이라는 행위가 그 대상의 가치를 높이는 중요한 심리적, 물리적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 디지털 음악은 '무한 복제'와 '즉시 전송'이라는 속성상 시간의 가치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어제 발매된 음원과 10년 전 음원의 데이터 품질은 동일하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술의 편리함 이면에,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경험의 깊이'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다림'은 단순한 지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고, 마침내 그것을 경험하는 순간의 '특별함'을 극대화하는 강력한 심리적 장치입니다. (기다림이 지각된 가치에 미치는 영향은 행동 경제학 분야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기다림'을 설계한 음악 감상 플랫폼은 어떤 모습일까요?



상상 속의 '숙성형' 음악 플랫폼


이 '슬로우 리스닝(Slow Listening)'의 철학을 디지털 스트리밍 시대에 어떻게 접목해볼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상상의 스케치를 그려봅니다.


시나리오 1: '타임 릴리즈(Time-Release)' 앨범 아티스트가 새 앨범을 발매합니다. 10개의 트랙 중 8개는 오늘 바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9번 트랙은 앨범 발매 1년 후에, 그리고 마지막 10번 트랙(히든 트랙 혹은 리믹스)은 5년 후에야 잠금이 해제됩니다. 플레이어에는 '2030년 10월 30일 숙성 완료'라는 메시지가 떠 있습니다. 이 방식은 아티스트와 팬 사이에 아주 긴 호흡의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팬들은 1년 뒤, 5년 뒤를 기약하며 이 앨범을 잊지 않고 다시 찾게 될 것입니다. 앨범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자라나는' 유기적인 존재가 됩니다. 1년 뒤 마침내 그 트랙을 들었을 때, 우리는 단순히 노래 한 곡을 듣는 것이 아니라, 1년이라는 시간의 무게와 그동안 변한 나의 모습을 함께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나리오 2: '제너레이티브 숙성(Generative Aging)' 음악 브라이언 이노(Brian Eno)가 'Music for Airports'나 'Bloom' 앱을 통해 보여준 '제너레이티브 뮤직(Generative Music)' 개념을 '숙성'과 결합하는 방식입니다. (제너레이티브 음악은 Eno의 강연 등에서 그 철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정 앰비언트 트랙을 구매하거나 스트리밍을 시작한 '순간'부터, 그 음악은 사용자의 시간과 함께 천천히, 그리고 미세하게 '숙성'되기 시작합니다. 처음 한 달은 아주 미니멀한 소리만 들리지만, 6개월이 지나면 와인의 부케처럼 새로운 악기 레이어(예: 부드러운 스트링 패드)가 희미하게 더해집니다. 3년이 지나면, 그동안 쌓인 사용자의 청취 데이터나 그날의 날씨 같은 외부 변수와 반응하여, 원본과는 또 다른 깊이를 가진, 오직 '나만의' 음악으로 변모합니다. 음악이 나의 시간을 '기록'하는 살아있는 사운드스케이프가 되는 것이죠.


시나리오 3: '참여 기반' 잠금 해제 꼭 절대적인 시간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관여도'에 따라 숙성이 완료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 앨범의 보너스 트랙이, 그 앨범의 다른 곡들을 합쳐 100번 이상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을 때(Skip 없이) 비로소 잠금 해제되는 방식입니다. 이는 플레이어에게 '빨리 감기' 대신 앨범 전체를 깊이 있게 감상할 '동기'를 부여합니다. 아티스트가 의도한 앨범의 서사를 온전히 경험한 팬에게만 주어지는 '보상'으로서의 음악이죠.



'기다림'이 우리에게 돌려줄 것들


이러한 '슬로우 리스닝'의 시도가 과연 지금의 '스킵 컬처'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음악의 '가치' 재발견: 클릭 한 번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때, 그 대상의 가치는 0에 수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시간'과 '노력'이라는 비용을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경험은 우리에게 훨씬 더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숙성형 음악'은 디지털 음악에 의도적인 '희소성(Temporal Scarcity)'을 부여함으로써, 우리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를 '소비'에서 '소장'으로, '흘려듣기'에서 '음미하기'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아티스트와의 '깊은 유대감': 음악을 듣는 경험이 10년에 걸쳐 완성된다면, 그 아티스트와 팬의 관계는 단순한 공급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함께 늙어가는 '동반자'의 관계에 가까워집니다. 이러한 깊은 유대감은 100만 번의 스트리밍보다 더 강력한, 아티스트의 든든한 창작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창작의 문법' 제시: 아티스트들 역시 새로운 창작의 문법을 얻게 됩니다. 5분짜리 히트곡을 만드는 대신, 5년에 걸쳐 서서히 변화하는 음악을 디자인할 수 있게 됩니다. 당장의 자극이 아닌,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느낄 수 있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음악에 담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viktor-forgacs-B88PgQXS4qg-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Viktor Forgacs

물론, 이 모든 것은 효율성과 즉각성을 추구하는 현대 스트리밍 시장의 흐름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어쩌면 비효율적이고 답답한 상상일 수 있습니다. 당장 내일 발매될 신곡을 기다리는 팬들에게 "1년 뒤에 들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도 있죠.


하지만 이 스케치를 통해 우리가 던져보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우리에게 '더 빠르게, 더 많이'를 선물해 주었다면, 이제는 그 기술을 활용하여 '더 깊게,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경험을 디자인해 볼 때가 아닐까요?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기다림의 미학'과 '시간의 가치'를, 바로 이 디지털 세상 속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디자인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 창작자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유한 영역일지도 모릅니다. 열한 번째 스케치북 페이지는 이렇게, 시간의 향기를 머금은 소리를 상상하며 마무리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운드 디스토션이 '마이야르 반응'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