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점(·)'과 '선(—)'으로 작곡하는 미니멀리즘의 가능성
생각 스케치 No.13
우리는 '소리'를 감정이나 분위기를 전달하는 매체로 생각하는 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만약, 소리가 순수한 '정보' 그 자체를 담는 그릇이 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 정보가 역사적인 무게를 담고 있다면 말입니다.
여기, 소리를 '점(·)'과 '선(—)'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이진법적 단위로 환원시킨 최초의 디지털 통신 기술, '모스 부호(Morse Code)'가 있습니다. "S.O.S." (... --- ...)라는 세 글자의 리듬은, 그 자체로 절박한 구조 신호라는 강력한 서사를 담고 있죠. (모스 부호의 역사와 원리는 위키피디아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이 '모스 부호의 리듬'을, 현대 음악, 특히 '미니멀 테크노(Minimal Techno)'나 '앰비언트(Ambient)' 음악의 핵심 악보(Score)로 사용해보는 상상을 시작해봅시다.
이 스케치는 '데이터 소니피케이션'(데이터를 소리화하는 것)과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근본적인 목적이 다릅니다.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데이터가 가진 고유의 '리듬'을 '음악적 재료'로 재발견하고, 그 안에 숨겨진 서사를 증폭시키는 예술적 시도에 가깝습니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몇몇 선구적인 아티스트들에 의해 멋지게 구현된 바 있습니다.
사례 1 :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의 "Radioactivity"
전자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크라프트베르크는, 그들의 1975년 앨범 타이틀 곡 "Radioactivity"에서 실제 모스 부호 사운드를 사용했습니다. 곡의 전반에 걸쳐 'R-A-D-I-O-A-C-T-I-V-I-T-Y' (...- . - .. --- .- -.-. - .. ...- .. - -.--)를 모스 부호로 송신하는 소리가 음악의 핵심 요소로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히 소리를 차용하는 것을 넘어, '방사능'이라는 차갑고 기계적인 주제를 가장 비인간적이면서도 정확한 정보 전달 방식인 '모스 부호'로 표현한, 완벽한 개념적 설계였습니다. (크라프트베르크의 모스 부호 사용에 대한 분석은 다양한 음악 매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례 2: 러시(Rush)의 "YYZ"
캐나다의 전설적인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러시(Rush)의 연주곡 "YYZ"는 이 아이디어를 더욱 음악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YYZ'는 그들의 고향인 토론토 피어슨 국제공항의 공항 코드입니다. 그리고 이 곡의 도입부에서 울려 퍼지는 독특한 5/4박자 리듬(-.-- -.-- --..)은, 바로 'Y-Y-Z'의 모스 부호 리듬 그 자체를 밴드 악기로 연주한 것입니다. 드러머 닐 퍼트(Neil Peart)와 기타리스트 알렉스 라이프슨(Alex Lifeson)은 모스 부호의 점과 선을 음악적 리듬으로 완벽하게 치환하여, 곡의 정체성을 알리는 동시에 그 자체로도 매우 중독성 있는 리프(Riff)를 만들어냈습니다. ("YYZ"의 모스 부호 리듬에 대한 이야기는 Classic Rock Magazine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선구적인 아티스트들이 '리듬'과 '텍스처'로서 모스 부호의 가능성을 증명했다면, 우리는 이 스케치를 어떻게 더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상상 1: 'S.O.S.'의 미니멀 테크노 타이타닉호가 절박하게 타전했던 S.O.S. 신호(... --- ...). 이 리듬을 상상해봅시다. '점-점-점 / 선-선-선 / 점-점-점'. 이 리듬 패턴을 미니멀 테크노의 '킥 드럼'이나 '하이햇' 패턴의 기본 골격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점(·)'은 짧고 날카로운 닫힌 하이햇(Closed Hi-hat)으로, '선(—)'은 그보다 긴 열린 하이햇(Open Hi-hat)이나 스네어드럼으로 치환합니다. 이 "...---..." 리듬이 4/4박자 위에 얹혀 끊임없이 반복되는 동안, 배경에서는 차갑고 깊은 바다를 연상시키는 앰비언트 사운드가 서서히 밀려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중독성 있는 테크노 트랙으로 들리겠지만, 그 리듬의 '출처'를 아는 사람에게는 100년 전 차가운 바다에서 울려 퍼졌던 절박한 메시지가, 시대를 넘어 댄스 플로어에서 울려 퍼지는 기묘하고도 서늘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상상 2: 최초의 전보, 그 설렘의 앰비언트 1844년, 새뮤얼 모스가 타전한 최초의 공식 전보 메시지는 "신께서 무엇을 이루셨는가!(What hath God wrought)"였습니다. 이 문장 전체의 모스 부호 리듬을 하나의 긴 '시퀀스'로 변환합니다. '점'은 맑은 벨(Bell) 소리나 피아노 단음으로, '선'은 그보다 조금 더 길게 울리는 음으로 설정합니다. 이 멜로디 조각들이 빠르지 않은 템포로, 아주 긴 잔향(Reverb) 속에서 천천히 연주되는 앰비언트 음악을 상상해봅니다. 우리는 그저 명상적인 음악을 듣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인류가 처음으로 시공간을 넘어 메시지를 전달했던 그 경이로운 순간의 '원문'을 귀로 읽고 있는 셈입니다. 소리가 역사의 텍스트를 담아내는 것이죠.
이러한 '모스 부호 작법'은 창작자와 감상자 모두에게 어떤 새로운 경험을 줄 수 있을까요?
창작자에게: '의미 있는 제약'이 주는 창의성 창작은 종종 '제약' 속에서 더 빛을 발합니다. '모스 부호'라는 정해진 리듬 체계는, "무엇이든 만들어봐"라는 막연함 대신 "이 리듬 안에서 너만의 것을 만들어봐"라는 명확하고도 흥미로운 '제약'을 줍니다. 러시(Rush)가 'YYZ'라는 코드에서 독창적인 리프를 뽑아냈듯이, 이 제약이 오히려 창작자가 평소에 시도하지 않았던 독특한 그루브나 멜로디를 발견하게 만드는 창의적인 '틀'이 될 수 있습니다.
감상자에게: '숨겨진 이야기'를 발견하는 즐거움 음악을 듣는 경험이 다층적으로 변합니다. 1차적으로는 음악 자체의 미니멀한 아름다움이나 리듬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2차적으로, 그 소리 패턴이 'S.O.S.'나 'Radioactivity' 같은 특정 단어의 모스 부호라는 '비밀 코드'임을 알게 되는 순간, 그 음악은 단순한 트랙이 아니라 해독해야 할 메시지이자 지적인 유희가 됩니다. 이는 음악에 깊이를 더하고, 아티스트와 팬 사이에 더 끈끈한 유대감을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숨겨진 요소를 찾는 즐거움은 [Aphex Twin] 같은 아티스트가 자신의 음악에 스펙트로그램으로 이미지를 숨겨놓았던 사례와도 맥을 같이 합니다.)
데이터와 예술의 만남 (다른 각도에서): 이전 스케치에서 다룬 '데이터 소니피케이션'이 과학적 데이터를 '정보 전달'의 목적으로 소리화하는 것에 가깝다면, '모스 부호 작법'은 역사적 데이터를 '음악적 재료'로 차용하여 '예술적 재해석'을 시도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차가운 데이터가 뜨거운 예술적 감성과 만나는 또 다른 방식이죠.
물론, 이 모든 것은 아직 스케치 단계의 상상입니다. 모든 모스 부호가 훌륭한 음악적 재료가 되지는 않을 수도 있고, 자칫하면 유치한 말장난처럼 들릴 위험도 있겠죠.
하지만 이 스케치를 통해 우리는 '음악'을 만드는 재료가 꼭 화성이나 멜로디 이론 안에만 갇혀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크라프트베르크와 러시가 보여주었듯, 인류가 소통하기 위해 만들었던 가장 원초적인 '코드' 속에, 어쩌면 가장 현대적인 미니멀리즘 음악의 심장이 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역사 속의 점과 선이 현재의 리듬으로 다시 태어나는 상상을 하며 마무리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