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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장자(莊子)의 '오상아(吾喪我)'로 본 헌터x헌터의 내면적 변혁

by JUNSE

관점 프리즘 No.02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장자(莊子)의 '오상아(吾喪我)'로 본 헌터x헌터의 내면적 변혁

출처 : www.peakpx.com

저는 지난 [관점 프리즘 No.01]에서, <헌터x헌터(Hunter x Hunter)>의 주인공 '곤(ゴン)'이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 편에 등장하는 거대한 물고기 '곤(鯤)'이며, 그가 '헌터 시험'이라는 관문을 통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여정이, 거대한 새 '붕(鵬)'이 되어 절대적 자유의 경지인 '천지(天地)'로 날아가려는 '외형적 변화'의 은유일 수 있다는 상상을 펼쳐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만화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변혁은, 밖으로 날아오르는 화려한 '비상(飛翔)'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저는 그 반대편,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나'라는 존재 자체가 내면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추락(墜落)'과 '상실(喪失)'의 순간에 진짜 변혁의 씨앗이 숨어있다고 생각합니다.


<헌터x헌터>의 서사 전체를 통틀어, 독자들에게 가장 압도적인 충격과 처절한 감동을 안겨준 순간은, 곤이 키메라 엔트 '네페르피트'를 향한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절망 속에서, 자신의 미래와 잠재력, '곤'이라는 존재 자체를 제물로 바쳐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얻게 되는 '각성'의 장면일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곤은 모든 것을 얻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워내고' '잃어버립니다'.


여기서 저는 2천 년 전 장자가 던진 또 다른 화두, '오상아(吾喪我)'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여정의 변화가 아닌, '나'라는 존재의 근본적인 죽음과 탄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늘의 소리를 듣는 조건: '나'를 잃어버리는 것


장자의 '제물론(齊物論)' 편에는, '오상아'의 경지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합니다. 남곽자기(南郭子綦)라는 이가 낡은 책상에 기댄 채, 넋을 잃고 마치 자신의 짝을 잃어버린 듯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제자 안성자유(偃師子遊)가 묻습니다. "어찌하여 오늘 선생님의 모습은 마른나무(槁木) 같고, 그 마음은 불 꺼진 재(死灰)와 같으십니까? 예전의 선생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자 남곽자기가 대답합니다.


"너는 사람의 퉁소 소리(人籟)와 땅의 퉁소 소리(地籟)는 들었어도, '하늘의 퉁소 소리(天籟)'는 아직 듣지 못했겠구나. ... (중략) ... 너는 아는가?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吾喪我)."


이 '오상아(吾喪我)'라는 말은, 단순히 '넋을 잃었다'는 심리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양 철학자 오강남 교수는 그의 저서 『장자』에서 이 구절을 '옛 자아의 죽음과 진정한 새 생명의 탄생'으로 해석합니다. '나(吾)'라는 주체가, 내가 그동안 '나'라고 생각해왔던 고정관념, 지식, 아집, 즉 '작은 나(我)'를 잃어버렸거나(喪) 장사지냈다는 선언입니다. (출처: 오강남, 『장자』, 현암사, 2007)


오강남 교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제자인 '안성자유'의 이름이 공자의 뛰어난 두 제자, '안회(顔回)'와 '자유(子游)'를 합친 이름일 수 있다고 흥미로운 해석을 더합니다. 이는 마치 "공자의 가르침(이론)에 따라 지적(智的)으로만 세상을 추구하는 한,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장자의 비판적 은유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퉁소 소리(天籟)'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만물을 스스로 그러하게 만드는 자연의 소리, 즉 '진정한 나'의 목소리이자, 그 어떤 이론이나 틀에도 갇히지 않는 '창의성의 원형' 그 자체일 것입니다. 장자의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기존의 지식과 이분법적인 고정관념(작은 나)을 스스로 '잃어버리는' 경지(오상아)에 이른 사람만이, 비로소 이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넨(念)'이라는 이름의 '오상아': 제약과 서약의 세계

출처 : www.hunterxnen.com 'What is Nen?'

<헌터x헌터>의 세계관에서, 장자의 '오상아'와 가장 닮아있는 개념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넨(念)' 시스템의 핵심인 '제약과 서약(制約と誓約)'을 선택하겠습니다.


'제약과 서약'은 자신의 능력에 스스로 '규칙'을 부과하고, 그것을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맹세'함으로써, 그 대가로 본래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얻는 기술입니다. 이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무엇을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를 '잃어버림(제약)'으로써 더 큰 힘을 얻는 역설적인 원리입니다.


이 만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들은 모두 이 '제약과 서약'을 통해 자신의 '오상아'를 경험합니다.


크라피카의 사슬: 그는 자신의 일족을 몰살한 '환영여단'에게만 자신의 넨 능력을 사용하겠다는 '제약'과, 만약 다른 이에게 사용할 경우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된다는 '서약'을 겁니다. 그는 '복수'라는 목적을 위해, 그 외의 모든 가능성(자신의 미래, 생명)을 '잃어버림'으로써, 여단 한정으로 무적에 가까운 힘(절대시간, 엠퍼러 타임)을 얻습니다. 이는 곤과 마찬가지로 '집착'에 기반한, 위험하고도 슬픈 '오상아'의 모습입니다.


곤의 처절한 각성: 그리고 이 '제약과 서약'의 가장 극단적인 발현이 바로 '곤'의 각성입니다. 곤은 '카이토'의 죽음을 마주하며, '피트를 쓰러뜨린다'는 복수심과 집착(작은 자아)에 사로잡힙니다. 그는 더 강해지기 위해 기존의 이론('넨'의 수련)에 매달리지만, 압도적인 적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죠. 마침내 피트와 마주한 곤은, '이론(수련)'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궁극의 선택을 합니다. "이것으로... 끝이라도 좋아. 내 모든 것을...!" 그 결과 탄생한 '곤육몬'의 모습은, 남곽자기처럼 '옛 자아'가 완전히 죽어버린 상태입니다. 거기에는 10대 소년 곤의 망설임이나 두려움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피트를 쓰러뜨린다'는 순수한 목적 그 자체만 남아있죠. 이것이 바로 곤이 들은 처절한 '하늘의 퉁소 소리'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잃어버림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힘을 얻었고, 이는 그에게 강함을 선사함과 동시에 모든 것을 앗아가는 파멸의 길이었습니다.



두 가지 다른 '오상아': 키르아와 메르엠의 길

출처 : gamerant.com 'Is Gon's Limitation Transformation Capable of Defeating Meruem?'


<헌터x헌터>의 위대함은, 곤과 크라피카처럼 '집착'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오상아'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오상아'를 통해 진정한 성장을 이루는 인물들을 함께 그려낸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키르아의 해방: '거짓된 나'를 잃어버리다

곤의 가장 친한 친구인 키르아의 여정은, 곤과는 정반대의 '오상아'를 보여줍니다. 키르아는 암살자 가문 조르딕의 '이론'과 '규칙'(예: 이길 수 없는 적과는 싸우지 마라)에 완벽하게 갇혀있던 '작은 자아'였습니다. 그는 형 '이르미'가 머릿속에 심어놓은 '세뇌의 침'이라는 물리적인 제약에 묶여 있었죠. 하지만 그는 곤과의 우정을 통해, 자신을 옭아매던 그 '거짓된 나(암살자로서의 정체성)'를 '잃어버릴' 용기를 얻습니다. 그는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머릿속의 침을 뽑아내고, 가문의 규칙을 깨뜨리며, 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겁니다. 키르아 역시 '오상아'를 경험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상실은 파괴가 아닌, '해방'이었습니다. 그는 '주입된 나'를 잃어버리고, 비로소 '친구를 지키는 진짜 나'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메르엠의 탄생: '왕으로서의 나'를 잃어버리다

이 내면적 변혁의 정점에는, 키메라 엔트의 왕 '메르엠'이 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종의 정점에 선 '왕'이라는, 완벽하지만 오만한 '작은 자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타인은 그저 먹이나 장기말에 불과했죠. 하지만 그는 군의(Gungi) 챔피언인 맹인 소녀 '코무기'를 만나면서 혼란에 빠집니다. 그 어떤 힘으로도 이길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코무기의 '존재' 앞에서, 메르엠의 '왕'이라는 정체성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는 코무기와의 관계 속에서 '왕으로서의 나'를 점차 '잃어버리고', 그 빈자리에 '코무기를 지키고 싶은 한 존재'로서의 ‘새로운 나'가 태어나게 됩니다. 그가 마지막 순간, 자신의 이름조차 잊은 채 코무기와 함께하는 장면은, 곤의 파괴적인 '오상아'와는 정반대에 있는, 가장 슬프고도 숭고한 '오상아'의 모습일 것입니다.



잃어버린 '나', 그리고 남겨진 질문

출처 : www.cbr.com 'Hunter x Hunter: A Complete Timeline of the Series'


장자의 '오상아'가 얽매임 없는 '자유(소요유)'를 향한 내면의 변혁이라면, <헌터x헌터>는 이 '오상아'가 어떤 방향으로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대한 서사시처럼 느껴집니다.


곤은 '집착'을 위해 '미래의 나'를 파괴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크라피카는 '복수'를 위해 '삶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키르아는 '우정'을 위해 '거짓된 나'를 버리고 해방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메르엠은 '사랑'을 위해 '오만한 나'를 버리고 인간성을 얻는 길을 택했습니다.



어쩌면 곤의 이야기는 장자의 철학에 대한 가장 비극적인 주석일지도 모릅니다. 남곽자기는 '작은 나'를 잃어버림(吾喪我)으로써, 비로소 '하늘의 퉁소 소리(天籟)'를 듣는 더 큰 존재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곤은 '작은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채, 그 집착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는 저에게 '나를 잃어버린다'는 것의 두 가지 얼굴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하나는 더 큰 자유와 창조를 위한 낡은 껍질의 탈피이며, 다른 하나는 집착으로 인한 자기 파멸입니다. 곤의 곁을 끝까지 지켰던 친구 키르아는, 어쩌면 곤이 잃어버린, 혹은 잃어버리기 직전의 '인간성'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장자가 말한 "스스로를 잃어버린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말은, <헌터x헌터>의 이 복잡한 인물 군상들을 통해 저에게는 더욱 심오한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과연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 대가로 '나'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어쩌면 곤이 들었던 그 처절한 비명과, 남곽자기가 들었던 고요한 침묵 모두가, 저에게는 '하늘의 퉁소 소리'가 가진 서로 다른 얼굴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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