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의 재질'을 넘어, '공간 속 공기'를 디자인하는 리버브의 물리학
생각 스케치 No.16
우리는 이전 생각 스케치(Sound Essay No.18)에서 핀란드의 거장 알바 알토(Alvar Aalto)의 건축 철학을 빌려, 리버브(Reverb)를 '공간의 따뜻한 재질감'과 '인간적인 온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당시 우리의 관심은 소리가 부딪히는 '벽'이나 '표면'(예: 차가운 콘크리트 vs 따뜻한 자작나무)이 어떻게 소리의 감성을 바꾸는지에 있었죠.
하지만 그 논의는 주로 '비어있는(Empty)' 공간을 전제로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디자인해야 할 것이 그 '빈 공간' 자체가 아니라,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언가'라면 어떨까요?
여기서 우리는 전혀 다른 분야의 물리학, 바로 '광학(Optics)'의 세계를 Mix 해보려 합니다. 빛이 맑은 날에는 직진하지만, 안개가 낀 날에는 공기 중 미세한 입자들과 부딪혀 부드럽게 퍼지는 '산란(Scattering)' 현상. 혹은 빛이 좁은 틈이나 장애물 모서리를 만났을 때 그 뒤편으로 휘어져 들어가는 '회절(Diffraction)' 현상처럼 말입니다. (빛의 산란 현상은 NASA의 설명 자료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번 스케치는 리버브를 '표면의 재질'이 아닌, 공간의 대기(Atmosphere)'와 ‘공기의 밀도'라는 렌즈로 다시 상상해 보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디지털 리버브의 파라미터(Parameter)는 대부분 '방의 크기(Room Size)', '초기 반사음(Early Reflections)', '잔향 시간(Decay Time)' 등입니다. 이 설정들은 기본적으로 '깨끗한 공기'로 채워진 '빈 방'을 가정합니다. 소리가 벽에 부딪히고 반사되는 과정을 시뮬레이션하는 것이죠.
하지만 현실의 공간은 결코 완벽하게 '비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중에는 수많은 미세한 입자들이 떠다닙니다. 비 오는 날의 높은 습도, 안개 낀 숲 속의 자욱한 수증기, 오래된 폐공장을 가득 채운 무거운 먼지 입자들. 이러한 '공기의 밀도'는 빛의 경로를 바꾸는 것처럼, 소리의 파동이 퍼져나가는 방식에도 분명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지금의 리버브가 '건축학'에 가깝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새로운 리버브는 *기상학' 또는 '대기 물리학'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이 '빛의 물리학' 원리를 사운드 디자인에 어떻게 적용해 볼 수 있을까요?
상상 1: '빛의 산란(Scattering)'을 '소리의 산란'으로
빛의 현상 : 태양 빛이 대기 중 질소, 산소 분자와 부딪혀 파장이 짧은 파란빛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때문에 하늘은 파랗게 보입니다. 안개가 꼈을 때 빛이 부드럽게 퍼져 보이는 것(미 산란, Mie Scattering)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리 디자인 적용: 이 '산란'의 개념을 리버브에 적용하는 겁니다. 단순히 벽에서 반사되는 소리(Reverb) 외에, 공간을 채운 '입자'들에 의해 소리가 부드럽게 흩어지고 퍼지는 '디퓨전(Diffusion)'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죠.
예시 : '안개 낀 숲'의 공간감을 디자인한다면, 소리의 고음역대(High-Frequency)가 습기에 의해 더 빨리 감쇠(Damping)되고, 소리 전체가 벽이 아닌 '공기 자체'에 의해 부드럽게 흩어지는 듯한, 몽환적이고 '밀도감' 있는 리버브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먼지 가득한 폐공장'이라면, 소리가 거친 입자들에 부딪혀 불규칙하게 흩어지는 듯한, 조금 더 거칠고 예측 불가능한 질감의 공간감을 디자인할 수 있겠죠. 이는 소리의 '꼬리'를 디자인하는 것을 넘어, 소리가 머무는 '공간의 공기' 자체를 디자인하는 일입니다.
상상 2: '빛의 회절(Diffraction)'을 '소리의 회절'로
빛의 현상 : 빛이 장애물의 모서리를 만났을 때 그 뒤편으로 휘어져 들어가는 현상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벽 뒤에 숨어도 빛의 일부(그림자의 경계가 흐릿해지는)를 볼 수 있죠.
소리 디자인 적용: 소리 역시 파장이 길수록(저음) 회절이 잘 일어납니다. 우리가 벽 뒤에서도 쿵쿵거리는 베이스 소리는 듣기 쉬운 이유죠.
예시 : 현재 많은 게임이나 VR 환경의 사운드 디자인은 이미 '오디오 레이 트레이싱(Audio Ray Tracing)' 기술을 통해 소리가 장애물에 막히는 현상(Occlusion)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NVIDIA의 VRWorks Audio 같은 기술이 대표적입니다.)
+ :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순히 '막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장애물의 모서리를 만나 '어떻게 휘어져 돌아 들어가는지' 그 회절 현상을 더 정교하게 시뮬레이션하는 겁니다. 문이 살짝 열린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 거대한 기둥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등이 훨씬 더 현실감 있게 구현될 수 있겠죠. 이는 공간을 더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만드는 핵심 기술이 됩니다.
이러한 '광학적' 리버브 디자인은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경험을 줄 수 있을까요?
압도적인 현실감과 몰입도 : 특히 가상현실(VR/AR)이나 게임 환경에서, 단순히 시각적으로만 안개 낀 숲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개의 '축축하고 밀도 있는 공기감'을 소리로 함께 전달할 수 있다면 사용자의 몰입도는 상상 이상으로 높아질 것입니다.
새로운 감성적 표현 도구 : 사운드 디자이너나 뮤지션에게도 새로운 표현의 도구가 생깁니다. 단순히 '긴 리버브'를 쓰는 대신, "안개처럼 흩어지는 리버브", "먼지처럼 거친 리버브", "새벽 공기처럼 차갑고 투명한 리버브" 등, 훨씬 더 구체적이고 감성적인 공간 질감을 창조해 낼 수 있게 됩니다.
기술과 자연 현상의 융합 : 이는 기술이 단순히 기계적인 계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복잡하고 유기적인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모방'하려는 시도입니다. 소리 디자인이 물리학, 기상학과 만나는 흥미로운 접점이 되는 것이죠.
물론, 이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계산해 내는 것은 엄청난 기술력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스케치를 통해 우리는 '리버브'라는 익숙한 도구를 전혀 다른 렌즈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전 '알바 알토' 스케치가 소리가 닿는 '벽'의 인문학적 온기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 스케치는 그 공간을 채우는 '대기'의 물리적 유기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운드 디자이너가 단순히 '방 크기'를 조절하는 것을 넘어, 그 방 안의 '안개 농도'나 '먼지의 밀도'까지 디자인하는 미래를 상상해 보는 것이죠.
열여섯 번째 스케치북 페이지는 이렇게, 텅 빈 공간이 아닌 '무언가로 가득 찬' 공간의 소리를 상상하며 마무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