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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옷감'처럼 만져진다면?

패션의 '드레이프성(Drapability)'으로 상상하는 앰비언트 사운드

by JUNSE

생각 스케치 No.17

소리가 '옷감'처럼 만져진다면?

패션의 '드레이프성(Drapability)'으로 상상하는 앰비언트 사운드 디자인


사진: Unsplash의 Bernd � Dittrich

우리는 종종 소리를 '듣는다'라고 하지만, 때로는 '만져진다'라고 느끼기도 합니다. "부드러운 소리", "거친 소리", "따뜻한 소리"처럼 말이죠.


자, 이번에는 이 '촉각적인' 비유를 패션 디자인의 세계로 가져가 봅시다. 패션 디자이너들은 '드레이프성(Drapability)'이라는 개념을 아주 중요하게 다룹니다. 원단이 중력에 의해 얼마나 부드럽고 유연하게 '흐르거나' '떨어지는지'를 나타내는 성질이죠.


출처 : www.whatgrandmawore.wordpress.com/


예를 들어, 1920년대 마들렌 비오네(Madeleine Vionnet)는 실크 크레이프 같은 얇고 유연한 원단을 사선으로 재단하는 '바이어스 컷(Bias Cut)'을 통해, 옷감이 마치 액체처럼 몸을 따라 부드럽게 흐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녀에게 옷감은 몸을 감싸는 유연한 물결이었습니다. (마들렌 비오네의 바이어스 컷에 대한 자료는 V&A 뮤지엄 등에서 그 혁신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면, 1950년대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óbal Balenciaga)는 정반대의 접근을 보여줍니다. 그는 '실크 가자르(Gazar)'처럼 뻣뻣하고 구조적인 옷감을 사용하여, 인체의 곡선에서 의도적으로 분리된 건축적인 실루엣(예: 튜닉 드레스, 코쿤 코트)을 만들어냈습니다. 그에게 옷감은 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몸이 머무를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재료였습니다. (발렌시아가의 건축적 디자인에 대한 설명은 V&A 뮤지엄 자료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출처 : www.icon-icon.com/


여기서 우리의 스케치가 시작됩니다. 만약, 우리가 공간을 채우는 앰비언트 사운드(Ambient Sound)를 '음악'이 아닌, 이처럼 고유의 질감과 흐름을 가진 '소재(Fabric)'로 접근한다면 어떨까요?



소리의 '드레이프성': 흐르는 소리 vs 서 있는 소리


패션 디자이너가 원단을 고르듯, 사운드 디자이너도 소리의 '물성'을 디자인할 수 있습니다.


상상 1: '비오네의 실크' 같은 앰비언스 사운드 (높은 드레이프성) 어떤 소리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마치 마들렌 비오네의 바이어스 컷 드레스가 몸을 감싸듯, 음의 시작(Attack)이 아주 부드럽고, 음의 끝(Release)이 아주 길게 이어지는 소리일 겁니다. 여러 소리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마치 물감처럼 서로 부드럽게 번져나가는 듯한 사운드죠. (예: 변화가 느린 신시사이저 패드(Pad), 긴 잔향(Reverb)이 걸린 벨 소리) 이런 '실크' 사운드는 어떤 공간에 어울릴까요? 고급 스파(Spa), 명상 공간, 혹은 미니멀한 갤러리처럼, 사람들을 차분하게 이완시키고 시간의 흐름을 잊게 만들어야 하는 공간에 완벽하게 어울릴 것입니다. 소리가 공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부드럽게 '감싸는' 경험을 주겠죠.


상상 2: '발렌시아가의 캔버스' 같은 앰비언스 사운드 (낮은 드레이프성) 반대로 발렌시아가의 구조적인 코트처럼, 뻣뻣하고 구조적인 소리는 어떨까요? 음의 시작과 끝이 명확하고, 소리의 질감이 거칠며(예: 약간의 노이즈나 디스토션), 리듬이 있더라도 변형 없이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는 소리일 겁니다. (예: 낮고 일정한 드론(Drone) 사운드, 기계적인 리듬 루프) 이런 '캔버스' 사운드는 인더스트리얼 스타일의 카페, 테크 기업의 로비, 혹은 활기 넘치는 패션 편집숍에 어울릴 수 있습니다. 소리가 공간에 '흐르는' 대신, 공간의 '구조'를 강조하고, 그곳의 에너지와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소리 재단사가 가져올 새로운 공간 경험


이처럼 소리를 '소재'로 바라보는 관점은, 공간을 기획하거나 브랜딩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새로운 도구를 쥐여줄 수 있을까요?


공간의 '무게감' 조절: 패션에서 원단이 옷의 실루엣과 무게감을 결정하듯, 앰비언트 사운드의 주파수 대역과 밀도는 공간의 '심리적 무게감'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가볍고 높은 주파수의 소리(실크)는 공간을 더 넓고 공기감이 느껴지게 만들고, 무겁고 낮은 주파수의 소리(캔버스)는 공간을 더 아늑하고 안정감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의 '촉각적' 전달: "우리 브랜드는 '부드러움'과 '유연함'이 핵심 가치입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매장에 비오네의 실크처럼 흐르는 앰비언트 사운드를 디자인하여 고객이 그 '부드러움'을 귀로 직접 만지게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혁신'과 '견고함'을 내세우는 브랜드라면, 발렌시아가의 구조적인 사운드를 통해 그 '단단함'을 청각적으로 경험하게 할 수 있죠. (이는 '소닉 브랜딩(Sonic Branding)'이 단순히 로고송을 넘어, 브랜드의 '질감'을 전달하는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예술적 영감: 사운드 아티스트나 뮤지션에게도 새로운 영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곡의 질감은 어떤 옷감과 닮았을까?"라고 질문을 던져보는 거죠. 거친 데님 재킷의 질감을 음악으로 표현해 보거나, 부드러운 캐시미어 스웨터의 감촉을 앰비언트 트랙으로 빚어내는 상상. 창작의 스펙트럼이 훨씬 더 풍부해질 것입니다.


사진: Unsplash의 Mila Tovar

물론, 이 모든 것은 아직 스케치 단계의 상상입니다. '소리의 드레이프성'을 측정할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죠. 하지만 이 스케치를 통해 우리는 '앰비언트 사운드'를 단순히 '배경음악(BGM)'으로만 취급하던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소리 역시 공간을 이루는 하나의 '소재'이자 '질감'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 소재를 어떻게 재단하고 배치하느냐에 따라, 공간을 입는 사람들의 경험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


열일곱 번째 스케치북 페이지는 이렇게, 소리를 만지고 입어보는 감각적인 상상을 하며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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