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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 '음악'을 연주한다면?

'광합성' 데이터를 넘어, '생명과의 교감'을 디자인하는 소리

by JUNSE

생각 스케치 No.18

식물이 '음악'을 연주한다면?

'광합성' 데이터를 넘어, '생명과의 교감'을 디자인하는 소리

rafael-rodrigues-LTsSbnPvnD4-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 Rafael Rodrigues

우리는 종종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앰비언트 음악을 틀거나, 실내에 식물을 들여놓습니다. 하나는 청각적인 요소이고, 다른 하나는 시각적, 생명적인 요소이죠. 우리는 보통 이 둘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음악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식물은 화분 속에서 조용히 자라날 뿐이죠.


그런데 만약, 이 둘이 하나로 합쳐진다면 어떨까요? 음악이 단순히 스피커에서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 식물로부터 실시간으로 '생성(Generate)'된다면 말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먼 미래의 공상과학이 아닙니다. 이미 'PlantWave'(PlantWave 공식 웹사이트) 같은 상용화된 기기들이 존재합니다. 이 기기들은 식물의 잎에 센서를 부착하여, 식물 내부를 흐르는 미세한 생체 전기 신호(Bio-data)의 변화를 감지합니다. 그리고 이 미세한 전압 변동 데이터를 MIDI 신호로 변환하여, 신시사이저가 연주할 수 있는 '음악'으로 만들어냅니다. 즉, 식물의 보이지 않는 '숨결'이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의 스케치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 기술을 단순히 "와, 식물이 노래하네?"라는 신기한 현상으로만 바라볼까요? 아니면, 이 기술을 '데이터 소니피케이션(Data Sonification)'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교감 방식'이자, '살아있는 브랜딩 도구'로 확장해 볼 수 있을까요?



살아있는 소리: '데이터'가 '음악'이 되는 원리

rick-rothenberg-OmG9SmcH5Yk-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 Rick Rothenberg

PlantWave나 'MidiSprout' 같은 유사 기기들의 작동 원리는 비슷합니다. 식물의 생체 전기 신호(Biometric Data)를 감지하여, 그 변화무쌍한 파동을 음악적 알고리즘(예: 특정 음계(Scale)나 패턴)에 통과시켜 소리로 변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데이터를 기계적으로 재생하는 '데이터 소니피케이션'(이전 스케치 No.21에서 다룬)과는 조금 다릅니다. 데이터 소니피케이션의 주목적이 정보의 '정확한 전달'(예: 주가 그래프)이라면, '식물 음악'은 데이터의 '예술적 재해석'에 가깝습니다. 데이터는 '악보'가 되고, 알고리즘은 '연주자'가 되어, 매 순간 다른 연주를 들려줍니다.


하지만 지금의 식물 음악은 대부분 '앰비언트(Ambient)''뉴에이지(New Age)' 스타일의 명상 음악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듣기에는 편안하지만, 그 가능성을 더 확장해 볼 수는 없을까요?



'듣는 식물'을 넘어, '들리는 식물'이 만드는 새로운 경험


이 '살아있는' 사운드 시스템을 단순히 명상 음악을 넘어선, 더 적극적인 '디자인 도구'로 활용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상상 1 : 공간의 '상태'를 알리는 인테리어 카페나 사무실 로비, 혹은 우리 집 거실의 조명, 온도, 습도, 그리고 식물의 광합성 활동량(빛 감지 센서 등)을 모두 하나의 '제너레이티브 음악' 시스템에 연결합니다.


[시나리오 A] 맑은 날 아침, 햇빛이 강해지고 식물들의 광합성이 활발해지면, 앰비언트 사운드의 톤(Tone)이 더 밝아지거나, 잔잔하던 드론 사운드 위에 맑은 벨 소리 같은 새로운 멜로디 레이어가 추가됩니다. [시나리오 B] 반대로, 해가 지고 조명이 어두워지면, 멜로디는 사라지고 낮은 저음의 사운드만 남아 공간을 차분하게 만듭니다. [시나리오 C] 식물에 물을 줄 시간이 되어 토양 습도 센서가 '목마름'을 감지하면, 음악의 질감이 점점 더 건조해지거나(Dry), 특정 소리(예: '물'을 상징하는 소리)의 빈도가 줄어듭니다. 이는 우리에게 "식물이 목마르다"는 정보를 경고음이 아닌, 감성적인 방식으로 알려주는 '상태 알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소리가 공간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반영하며, 정적인 인테리어를 넘어 '살아 숨 쉬는 환경'을 만듭니다.


상상 2 : 브랜드 철학을 '연주'하는 매장 자연 친화적인 가치를 내세우는 화장품 브랜드(이전 스케치 No.16의 '이솝'처럼)나, 유기농 식품을 파는 매장을 상상해 봅시다. 그들은 매장에 미리 녹음된 자연의 소리나 편안한 음악을 트는 대신, 매장 중앙에 설치된 '살아있는 식물' 그 자체를 '음악의 원천'으로 사용합니다. 고객들은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이 공간의 음악은 지금 저 식물이 실시간으로 연주하고 있습니다"라는 안내를 받습니다. 고객들은 단순히 제품을 구매하는 것을 넘어, 그 브랜드가 추구하는 '생명', '자연', '진정성'이라는 가치를 소리를 통해 실시간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이는 그 어떤 광고 카피보다 더 강력한, '살아있는' 소닉 브랜딩(Sonic Branding)이 될 수 있습니다.

상상 3 : '교감'을 위한 새로운 예술 장르 미디어 아티스트들은 이 기술을 활용하여, 관객과 식물 간의 '상호작용'을 탐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관객이 식물에게 말을 걸거나, 손을 대거나, 혹은 숨을 내쉴 때(CO2 센서 감지), 식물의 생체 신호가 미묘하게 변하고, 그에 따라 음악이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설치 작품을 만드는 겁니다. 이는 관객에게 "나의 행동이 다른 생명체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청각적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자연과의 '연결'과 '교감'을 느끼게 하는 강력한 예술적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식물 상호작용 예술은 Mileece 같은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통해 이미 탐구되고 있습니다.)



식물의 소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이러한 '식물 음악'의 가능성은, 우리에게 '음악'과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작곡가'는 누구인가? 음악이 식물의 생체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다면, 과연 '작곡가'는 누구일까요? 아티스트일까요, 알고리즘일까요, 아니면 식물 그 자체일까요? 어쩌면 '인간 중심의 창작'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진짜' 앰비언트 뮤직의 구현: 브라이언 이노(Brian Eno)가 앰비언트 음악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흥미로워야 한다(as ignorable as it is interesting)"고 정의했듯, '식물 음악'은 이 철학의 완벽한 구현일 수 있습니다. 집중해서 들으면 자연의 미세한 변화를 느낄 수 있지만, 그냥 배경으로 두면 공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가장 이상적인 '환경 음악'이 되는 것이죠.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 가장 중요한 지점입니다. 우리는 식물을 그저 '바라보는' 대상에서, 그들의 보이지 않는 활동을 '듣는' 대상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됩니다. 식물에 물을 주었을 때 사운드가 즉각적으로 풍성해지는 것을 들으며, 우리는 자연과 '소통'하고 '교감'한다는 감각적인 만족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술이 우리를 자연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잊고 있던 자연의 미세한 속삭임을 다시 '듣게' 만드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chris-M9r9fkWKF6g-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 Chris

물론, 이 모든 것은 아직 스케치 단계의 상상입니다. 식물의 생체 신호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도 여전히 탐구 중인 영역이며, 이를 음악적으로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아티스트의 예술적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이 스케치를 통해 우리는 '음악'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음악이 반드시 인간의 격렬한 감정을 표현하거나 복잡한 서사를 전달해야만 할까요? 어쩌면 때로는, 우리 곁에 있는 다른 생명체의 조용한 '존재'와 '흐름'을 그저 소리로 번역하여, 우리가 잊고 있던 자연의 느린 호흡을 다시금 '듣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역할일 수 있지 않을까요?


열여덟 번째 스케치북 페이지는 이렇게, 식물의 조용한 숨결을 소리로 상상하며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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