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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음'의 쓸모: 예술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장자(莊子)의 '무용지용(無用之용)'으로 생각해 보는 예술의 의미

by JUNSE

관점 프리즘 No.03

'쓸모없음'의 쓸모: 예술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장자(莊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으로 다시 생각해 보는 예술의 의미


출처 : 김포신문 '[이화자 선생의 한자성어] 무용지용'


"이 음악, 참 듣기 편하네요.", "이 그림, 우리 집 거실에 걸면 딱 좋겠어요.", "이 영화는 사회에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군요."


우리는 종종 예술을 이렇게 '쓸모'의 잣대로 평가하곤 합니다. 나에게 위로를 주었는가(정서적 기능), 나의 공간을 아름답게 꾸며주는가(장식적 기능), 나를 일깨우는 교훈을 주었는가(사회적 기능), 혹은 얼마의 가치(경제적 기능)가 있는가. 이처럼 예술은 늘 '무엇을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기대받습니다. 저 역시 사운드 디자이너로서, 혹은 기획자로서, 제가 만드는 소리가 '어떻게'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고 사용자의 경험을 '쓸모 있게' 만들 것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합니다.


하지만 만약, 예술의 여러 가치 중의 하나가 '쓸모'의 잣대를 벗어던진, 바로 그 '쓸모없음' 그 자체에 있다면 어떨까요? 여기서 저는 2천 년 전 장자(莊子)가 우리에게 남긴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역설적인 화두를 꺼내려합니다.



목수의 눈을 피한 거대한 나무


장자의 여러 편(「인간세(人間世)」, 「소요유(逍遙遊)」 등)에는 '쓸모없는' 거대한 나무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어느 목수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 마을의 신목(神木)처럼 거대하게 자란 상수리나무를 봅니다.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릴 만큼 거대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죠. 하지만 목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쳐 갑니다. 제자가 그 이유를 묻자, 목수가 대답합니다.


"저 나무는 아무 데도 쓸모없는 '산목(散木)'이라네. 배를 만들면 금방 가라앉을 것이고, 관을 짜면 금방 썩을 것이며, 기둥을 만들면 좀이 슬고, 문을 만들면 진이 흘러나올 게야. 아무 쓸모가 없기에 저토록 오래 살 수 있었던 걸세."


목수의 기준, 즉 '쓸모 있음(有用)'의 잣대로는 이 나무는 최악의 재료입니다. 하지만 장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의 관점을 뒤집어 버립니다. 목수에게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이 나무는 베어 지지 않고 본래의 모습(거대함)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과 동물에게 시원한 그늘과 쉼터를 제공하는, 차원이 다른 '쓸모(無用之用)'를 발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장자의 무용지용 철학은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등에서 그 핵심 사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쓸모'의 세계 vs '쓸모없음'의 세계: 경계에 대한 존중

사진: Unsplash의Jac Alexandru

저는 이 거대한 나무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가 창작물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쓸모'를 기준으로 창작물을 재단하는 순간, 그 창작물은 '목수의 목재'가 되어버립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상업적인 '쓸모'를 가질 수밖에 없는 창작물들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대중문화'의 범주에 속합니다. 예를 들어, 대중음악은 청자의 '공감'이라는 명확한 목적을 전제로 설계되며, 이는 종종 상업적인 성공과 직결됩니다. 인디음악조차 처음에는 비주류의 '쓸모없음'에 머무르는 듯 보이지만, 결국 대중의 공감을 얻어 주류로 편입되는 순간, '유명세'라는 새로운 '쓸모'를 획득하게 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구분이 결코 '수준'이 높거나 낮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저는 대중음악이나 상업 예술 분야에서 걸작을 만들어내는 거장들을 깊이 존경합니다. 그들은 종종 획기적인 테크닉이나 복잡한 예술적 관점을, 대중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풀어서 해석해 내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장인들입니다.


우리가 흔히 어떤 대중문화 작품을 보고 "저건 정말 '예술'이다"라고 감탄할 때, 그것은 바로 이 경지에 이른 '장인 정신(Mastery)'과 기술적 성취에 대한 찬사일 것입니다. 이는 제가 말하는 '쓸모없음'과는 다른 맥락이지만,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가치임에 틀림없습니다.


대중문화 안에도 분명히 '예술적인 부분'은 존재하며, 어떤 부분에서는 오히려 넘쳐난다고 생각이 듭니다. 비록 '공감'이나 '상업적 성공'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을지라도, 그 결과물이 당초의 목적을 훨씬 뛰어넘는 압도적인 감각과 성취를 보여주는 사례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다만, 제가 이 글에서 '무용지용'이라는 렌즈를 통해 탐구하려는 것은, 이러한 '쓸모'의 성취와는 구별되는, 그 어떤 목적에도 얽매이지 않는 '존재'로서의 예술이라는 또 다른 차원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순수예술'이라고 하는 것, 즉 목수의 눈(세상의 척도)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였던 그 나무. 우리의 즉각적인 필요(위로, 교훈, 이익)를 채워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예술. 그것은 비로소 그 거대한 그늘을 드리울 수 있습니다.



예술의 그늘: '소요유(逍遙遊)'의 공간

사진: Unsplash의Ali Gündoğdu

그렇다면 예술의 '쓸모없음'이 우리에게 주는 궁극적인 '쓸모', 즉 그 '거대한 그늘'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바로, 우리를 '쓸모'의 세계로부터 잠시나마 완벽하게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위해' 살아갑니다. 돈을 벌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모든 행위에는 목적과 쓸모가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제가 도저히 '쓸모'를 찾기 힘든 어떤 예술 작품(예: 추상화, 전위 음악, 난해한 현대무용) 앞에 섰을 때, 저는 처음으로 당혹감을 느낍니다. "이걸로 뭘 해야 하지?", "이게 나한테 무슨 의미지?"


바로 그 순간, '쓸모'를 찾으려던 이성적인 뇌가 작동을 멈춥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우리가 지난 [관점 프리즘 No.02]에서 이야기했던 '하늘의 퉁소 소리(天籟)', 즉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받아들이는 순수한 감각이 깨어납니다. 더 이상 예술을 '도구'로 분석하는 대신, 그저 그 작품이 뿜어내는 색채와 형태, 소리의 울림 그 자체와 마주하게 되죠.


이것이야말로 장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 즉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절대적 자유의 경지가 아닐까요? 예술의 가장 큰 '쓸모'는, 우리를 끊임없이 '쓸모'를 강요하는 이 피로한 세상으로부터 잠시나마 완벽한 정신적 자유를 누리게 해주는, 그 거대한 '나무 그늘' 같은 공간을 제공하는 것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사운드 디자이너이자 기획자로서, 매일 '쓸모 있는' 소리, '기능적인' 기획을 만들어내기 위해 분투합니다. 클라이언트의 목적에 부합해야 하고, 사용자의 편의를 높여야 하며,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는 '쓸모없는' 예술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장의 기능과 목적에서 벗어나,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거대한 나무 그늘(예술) 아래서 잠시 쉴 때, 저는 비로소 '쓸모'에 갇혀있던 저의 '작은 나(我)'를 잃어버리고(吾喪我), 제가 하는 일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할 힘을 얻습니다.


세상의 잣대로는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그것들이, 실은 우리가 '쓸모 있는'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가장 거대한 '쓸모'를 지니고 있다는 역설. 어쩌면 우리는 이 '쓸모없음의 쓸모'를 이해하기 위해 예술을 갈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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