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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5. 2021

<혐오>

로만 폴란스키, 1965


 로만 폴란스키의 <물속의 칼>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첫 번째 장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영화 <혐오>가 두 번째 장편이라고 한다.


 얼마 전 봉준호에게 황금종려 나뭇가지를 건네줬던 그 할머니

 카트린느 드뇌브가 당시 22살의 청순한 신인여배우로 이 영화의 주인공 '캐롤'을 연기한다.


 캐롤은 뷰티샵 같은 곳에서 여성고객들의 손톱을 다듬어주는 일을 한다.

 그녀는 말수가 적고 수줍음이 많다. 표정이 울적해 보인다.

 캐롤은 언니와 함께 낡은 아파트를 빌려 생활하는데 언니는 그녀에게 다정하다.

 하지만 언니는 걸핏하면 남자친구(유부남이다)를 데려와 자기 방에서 자고 간다.

 그런 밤이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언니의 억눌린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다음날 아침 화장실에는 캐롤의 칫솔을 꽂아둔 컵에 그 남자의 칫솔이 꽂혀있다.


 밤새 잠을 설쳤던 캐롤은 그 남자의 칫솔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캐롤을 쫒아 다니는 잘생긴 남자 콜린이 있다. 콜린은 캐롤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고 기껏 데이트약속을 잡아도 캐롤은 나타나지 않는다.

 캐롤은 그에게 싫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캄캄한 밤이면 캐롤은 침대에 누워 남자가 자신을 강간하는 악몽에 시달린다.


 언니가 남자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캐롤은 아파트에 홀로 남는다.

 혼자서 점점 심해져가는 캐롤의 히스테리를 영화는 청각(시계초침, 교회종소리, 전화벨 등)과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쩍쩍 갈라져버리는 벽의 환각)으로 표현한다.

 콜린과 첫 키스를 해버린 바로 그 시점에 캐롤의 히스테리는 발작에 가까워져 가죽을 벗긴 토끼를 전화기 대신 테이블에 올려놓는 등의 기행을 저지른다.


 캐롤은 남자를 혐오하는 것인가?(여기서의 혐오는 일단 거부감이다.)

 혐오한다면 그 혐오의 감정이란 대체 무엇일까?


 되짚어보면 캐롤은 남자만을 혐오하는 게 아니다. 그녀의 직장, 뷰티샾을 찾아오는 중년부인들의 주름 가득한 얼굴을 카메라는 캐롤의 심정에 이입하여 환멸어린 시선으로 쳐다본다. 그녀들은 점점 추해져가는 외모를 어떻게든 수습해보고자, 어떻게든 자신을 향한 뭇 남자들의 욕망을 지켜보고자 찾아온 고객들이다.(카메라와 그녀의 시선에 이입한다면)

 캐롤은 고객 한 명의 손가락을 찔러버린다. 왜 그랬는지 물으면 그녀는 대답하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왜 그랬는지, 내가 왜 이러는지.


 캐롤은 더 이상 집밖을 나오지 않고 집안에서 점점 고립되어 빠르게 미쳐간다.

 급기야 정말 미친 짓을 저질러버리고 그 미친 짓을 감당하지 못하는 그녀 주위로 낡은 아파트 벽마다 남자들의 큼직한 손이 튀어나와 그녀를 위협한다.

 스틸 컷에서 보다시피 캐롤은 단순히 두려워하는 것 이상으로... 적어도 캐롤을 연기하는 카트린 드뇌브는 벽에서 튀어나온 손길을 공포스러워하는 것과 더불어 또 다른 감정을 연기하고 있다. 보면 알 것이다.


 이런 영화 의도는 훗날 변태감독으로 유명해지게 될 그의 왜곡된 여성상이 반영된 결과일까? 아니면 캐롤이 가진 혐오라는 감정에 대한 나름의 통찰일까?


 혐오에 대한 내 개인적인 입장은

 거리의 개가 싼 똥보다는 나와 같은 인간이 싼 똥이 훨씬 더 크고 냄새나고 혐오스럽다는 것이다. 혐오하는 자와 혐오당하는 대상 사이에는 모종의 공유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다. 적어도 이 영화에 한정하여 볼 때 캐롤이 남자들에게 품는 혐오는 그녀와 남자 사이에 흐르는 맹목적인 리비도에 근원하는 것 같다.


 캐롤에게 보여지는 증상이 너무나 히스테리컬하므로 히스테릭이 억압된 성욕에 기인한다는 고전적인 정신분석학의 견해가 떠오르기도 한다. 영화를 보면서 당연히 <로즈마리 베이비>가 떠오르기도 했다. 어쩌면 <세입자>와 더불어 이 영화가 초고 같은 역할을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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