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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5. 2021

<텍사스 전기톱 학살>

토브 후퍼, 1974


 영화의 시작은 절망적이다.

 검은 화면 노란 글씨로 이 영화에서 보게 될 것은 다섯 명의 젊은이가 겪은 참혹한 비극이라고 미리 알려주기 때문이다. 또 실화라는 뉘앙스를 주는데(영화의 어디까지 실화를 소재 삼았는지는 따로 논하지 않겠다.) 


 잠시 후 밴을 타고 여행하는 대학생들을 보게 된다. 정확히 다섯 명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모두 죽을 거라고, 이 영화를 보는 나는 그들이 어떻게 참혹하게 살해당할지를 구경하는 입장이지 않나... 라고 생각하며 보게 되었다. 

 왜 내가 그것을 봐야 할까?(나는 그런 것을 보고싶은 걸까? 그런 걸 봐서 뭘 얻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다섯 명의 예정된 희생자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자가 세 명, 여자가 두 명이다. 

 프랭클린과 프랭클린의 여동생 샐리, 샐리의 남자친구 제리.

 역시 연인 사이인 것 같은 커크. 그러니까 커플이 두 쌍이고 샐리의 오빠 프랭클린은 혼자다. 더군다나 그는 다리를 쓰지 못해 휠체어에 타고 있으며 뚱뚱하고 성격도 매력적이지 않다. 본격적인 살육이 펼쳐지기 전까지 다섯 멤버 중 가장 이상하게 튀는 존재가 바로 이 프랭클린이다.


 프랭클린의 여동생 샐리는 오빠에게 다정하다. 다른 친구들도 착해 보이지만

 막상 밴에서 내리면 샐리와 제리, 커크와 팸은 커플들끼리 킥킥거리며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프랭클린은 휠체어에 처박힌 채 혼자 남는다. 

 그는 깡통에 소변을 보다가 비탈에 미끄러져 휠체어와 함께 굴러 떨어진다.

 말하자면 그는 굴욕적인 존재다. 그는 섹슈얼리티의 놀이터에서 배제당한, 소외당한 존재다.


 그들이 탄 밴이 도살장을 지나갈 때 프랭클린은 두 명의 여자들을 청자삼아 

 소와 돼지를 도축하는 과정을 잘 안다는 듯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녀들이 무서워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공포스러워하는 표정이 즐겁다는 듯이... 

 중간에 히치하이커를 한 명 태운다. 그리고 그는 진짜 도축업자다. 프랭클린이 눈빛을 반짝이며 도축에 대해 질문하자 도축업자는 기꺼워하며 설명하다 나이프를 꺼내 자신의 손바닥을 찢는다. 뿐만 아니라 이에 경악한 프랭클린의 팔을 낚아채 프랭클린의 피까지 보여준다. 히치하이커를 쫓아내지만 이제 다섯 멤버 중 누구보다 겁에 질린 쪽은 프랭클린이다. 도축과 공포에 호기심을 보였던 프랭클린은 사실 다섯 명 중 가장 신체적으로 약하고 정신적으로도 소심하다.


 나중에 덕지덕지 기운 누군가의 얼굴 가죽을 자기 얼굴에 둘러쓴 살인마가 등장했을 때 이 살인마도 몸집이 크고 뚱뚱하다그는 걸을 수 있지만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일종의 언어장애가 있는 것 같다. 

 이 살인마는 우연히 자기 집을 찾아온 커크를 망치로 내려친다. 머리가 부서져서 쓰러진 커크의 팔과 다리가 경련을 일으킨다. 커크를 찾아나선 그의 여자친구 팸이 다음 희생자다. 그녀는 핫팬츠에 등이 훤하게 드러난 옷차림이다. 따가운 여름햇살 아래 카메라는 그녀의 늘씬한 다리와 연한 갈색의 등을, 살갗을 바라본다. 

 살인마는 비명을 내지르는 팸을 버둥대는 새끼양처럼 들처업고 뒤뚱뒤뚱 지하실로 걸어 내려간다. 지하실은 사람의 뼈가 짐승의 뼈다귀들과 뒤섞여 널브러져 있다. 살인마는 팸을 들어서 정육용 고기걸이에 꿰어버린다.

 그녀의 노출된 등짝에 쇠가 뚫고 들어온다. 그녀는 죽지 않았다. 아직 의식이 또렷한 채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다가 살인마가 전기톱으로 그녀의 남자친구를 도축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비명과 전기톱의 굉음이 뒤섞인다. 

 이 소리, 여자의 비명과 전기톱의 비명이 영화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영화는 최근의 호러영화처럼 관객들을 놀래키며 치고 빠지지 않는다. 희생자는 끝까지 도망치고 살인마는 끝까지 쫓아온다. 전기톱은 계속 웅웅대고 도망자의 찢어지는 비명도 계속된다. 비명은 절규가 되어서, 절규는 생존 자체를 호소하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흡사해진다.

 소리가 거칠듯 비주얼도 거칠다. 핸드헬드 카메라는 전기톱과 여자의 비명 사이에서 덤불과 나뭇가지로 막힌 캄캄한 숲을 돌진한다. 결국 붙잡힌 여자의 겁에 질린 낯짝을 카메라는 흥분한 시선마냥 샅샅이 훑어내린다. 그녀의 자의식이 가죽처럼 벗겨져 붉은 핏덩이의 공포만이 남은... 그녀의 핏발 선 눈동자를 닿을 듯 클로즈업한다. 카메라는 오랫동안 쳐다본다. 얼마나 너의 공포가 동물적으로 순수한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듯...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공포스러운 죽음이 뭘까?

 우리가 자존심을 내세워 똑똑한 척 떠들어대는 자아가 전기톱으로 산산조각 나버려 우리가 씹어 먹는 소와 돼지와 다를 바 없이 순전한 동물로서 도축당하는 것... 바로 그러한 공포, 날것의 생생함을 전달하기 위해서 영화는 최선을 다하는 것 같다. 프랭클린이 호기심을 품었듯 바로 그런 게 우리가 궁금해하는 공포의 본질에 가깝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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