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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6. 2021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나쁜 남자>

김기덕, 2001


 가난한 소년이 부잣집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좋아했다.

 그런데 말했다시피 소년은 가난했고 소녀는 부자였다. (두 번 세 번 네 번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계급의 벽, 현실)

 소년과 소녀는 헤어진다. 소년은 1차 대전에 참전한다. 살아 돌아온 소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부자 ‘개츠비’가 된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근본 있는 부자 톰 뷰캐넌과 결혼한 데이지 뷰캐넌이 되었다. 

 그럼에도 제이 개츠비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톰과 데이지가 사는 저택과 해협을 사이에 둔 맞은편에 자신의 저택을 짓는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 밤 성대한 파티를 열어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를 초대한다. 아무 대가없이 그들에게 술과 음식과 연주와 드레스까지도 제공한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취하고 춤추고 떠들어대며 그들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한 사람 이 저택의 주인에 대해 수군거리고 의심하고 의혹하며 흉흉한 소문들을 주고받는다. 개츠비는 소란스러운 그들로부터 물러나 매일 밤 해협 건너편의 데이지가 살고 있는 저택의 녹색불빛을 바라본다. 언젠가는 그가 알고 그를 아는 유일한 한 사람 그녀가 이 파티에 나타나 줄 것을 그는 기다린다. 그녀가 나타나면 자신이 그녀에게 닿기 위해 노력해서 얻어낸 이 모든 것들을 그녀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 날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순간이 될 것이다.  


 뭐가 위대하다는 건지... 천박하고 통속적인 이야기에 불과한데 라며 실망한 독자는 그대로 책을 덮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명한 작가이자 우리시대의 사상적 멘토.. 예를 들어 혜민스님 같은 분이라면 그 천박함과 통속성을 좀 너그럽게 충고해줄지도 모르겠다. 

 이봐, 개츠비야. 넌 그 여자를 진실하게 사랑하는 게 아니란다. 넌 단지 그 여자의 반짝거리는 배경, 반짝거리는 아름다움에 환상을 품었을 뿐이야. 그리고 그 환상에 닿기 위해 범죄까지 서슴지 않았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헛된 욕심을 버리려무나. 다 버릴 필요는 없고 적당히, 적당히만 버리면 돼. 그게 더 지혜로운 거란다.

 그런데 개츠비는 버릴 생각이 없다. 

 그 천박하고 통속적인 자신의 꿈을 버리고나면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은 개츠비도 그 꿈이 헛되고 헛된 환상에 불과할 것임을 예감하고 있는 것 같다.  


 데이지의 흰 얼굴이 자신의 얼굴에 가까워지자 그의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울렸다그는 알았다그가 그녀에게 입 맞춰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의 꿈이 그녀의 사그라질 숨결과 영원토록 얽히고 나면 다시는 뛰어놀지 못할 그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과 같아질 것임을그래서 그는 기다렸다별에 부딪힌 소리굽쇠에 좀 더 귀를 기울이며그리고 그녀에게 입 맞추었다그의 입술이 닿자 그녀는 꽃처럼 피어났고 그의 꿈은 현실의 육체를 얻어 완성되었다


 개인적으로 참조 번역한 소설 일부다. 다음은 무엇일까? 그가 그녀에게 입 맞추고 나면, 그의 꿈이 현실로 이뤄져 육체성을 획득하고 나면. 꿈은 영원하다. 육체는 늙고 병들고 죽거나 부패한다. 가장 사소하게는, 갖고 싶던 장난감을 가지고 나면 머지않아 시들해지고 마는 것처럼. 가장 애틋하게 그리워했던 연인과 긴 시간을 함께하며 그 시간이 점점 빛 바래는 것처럼. 한때는 데이지를 꿈꿨던 그녀의 남편 톰도 이제는 정비공의 아내 머틀과 외도를 저지른다. 한때는 정비공 윌슨에게 반했던 그의 아내 머틀도 이제는 톰에게 반해버렸다. 그들은 그들의 소중했던 꿈을 소각해버린 ‘재의 골짜기’에서 또 새로운 꿈을 찾아서 탐닉하고 소비한다. 그들이 천박하고 통속적인 자들에 지나지 않다면 자신의 천박하고 통속적인 꿈에만 매달려 온 개츠비는 다를 수 있을까? 개츠비는 데이지와 재회한다. 그의 꿈은 완성되었으므로 그 순간부터 소멸되기 시작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녀를 무한한 환상으로 키워왔기에, 바로 그 환상의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와 그녀를 만났기에 현실의 데이지는 결코 그가 꿈꿨던 만큼 그를 사랑할 수 없다. 하지만 개츠비는 우둔할 만치 현실을 부정하고, 데이지는 차츰 겁에 질리고, 그래서 현실로부터 도주하던 데이지는 정비공 윌슨의 아내이자 남편의 여자, 머틀을 차에 치어 죽인다. 개츠비는 데이지가 저지른 죄를 뒤집어쓴다. 이제 폐허가 된 거대한 저택에 혼자 남은 개츠비는 데이지의 전화가 걸려오기를 기다린다. 그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정비공 윌슨이 나타나 그의 이마에 총구를 겨눈다. 

 완벽했던 꿈이 완벽하게 박살나 부서지고 망가져버린 이후에도, 끝끝내 그 폐허에서 그녀를 기다렸던 그를, 그래서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파괴에 임박했던 그의 꿈이 결국 그의 파괴된 육체로부터 벗어나 꿈의 영원불변함을 회복했으므로. 더는 늙거나 병들거나 죽을 수도 부패할 수도 없는 오직 꿈으로서만, 개츠비는 죽음으로 자신의 판타지를 지켜낸 셈이다. 


 이 소설을 쓴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을 내켜하지 않았다고 한다. ‘꿈꾸는 여인에게 닿기 위해 황금모자를 쓰고 높이 뛰어오르는 남자의 이야기’ 그래서 <황금모자를 쓴 개츠비>라는 직설적인 제목을 원했다고 한다. 피츠제럴드는 젊은시절 1차 대전에 참전했다. 미국남부에서 훈련받던 중 그는 젤다라는 부유한 집안의 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와 약혼까지 하지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파혼 당한다. 전쟁이 끝나고 첫 장편소설을 펴내 성공한 피츠제럴드는 다시 젤다를 만나 결혼한다. 젤다와 피츠제럴드는 방탕했고 서로에게 충실하지도 못했다. 점점 불어나는 빚을 감당하기 위해 피츠제럴드는 세 번째 장편소설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는 출간되자마자 쫄딱 망해버렸다. 피츠제럴드는 45세에 알콜중독에 빠진 채 여전히 글을 쓰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로부터 8년 후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던 그의 아내 젤다는 화재로 사망한다. 2차 대전이 발발하고 전선의 군인들에게 진중문고로 보급되면서 부활한 <위대한 개츠비>는 위대한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어쩌면 당시 참호 속에 틀어박혀 있었을 한 병사는 이 소설을 펼치자마자 첫 페이지의 여백에 새겨진 피츠제럴드의 첫 문장을 발견했을 것이다. 


 Once again to Zelda...



 다시 한 번 개츠비가 아닌, 개츠비와 정반대의 길을 택했던 <나쁜 남자>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영화의 처음, 영화의 주인공 ‘한기’는 도심한복판에서 여대생 ‘선화’를 발견하고 눈을 떼지 못한다. 그는 그녀가 앉아있는 벤치 옆자리에 앉는다. 카메라는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모습을 정각의 정지된 사진처럼 바라본다. 뚫어져라 자신을 보는 한기를 선화는 혐오스러워하는 듯한 눈빛과 표정으로 피해 달아나고 남자친구의 품에 안긴다. 한기는 일어나서 선화에게 강제로 입 맞춘다. 선화의 남자친구에게 얻어맞은 한기가 말없이 돌아서 가려는데 선화는 군중들 가운데서 그가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한기는 제대로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거의 말하지 않는다.) 구경하던 군인들이 나서 한기를 패고 다른 군중들도 가세해 그를 짓밟는다. 억지로 끌려나온 한기의 얼굴에 선화는 침 뱉는다. 

 한기는 복수하기 위해 덫을 놓는다. 선화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이 있었을지언정 결국 한기의 음모에 말려들어 창녀촌으로 끌려온다. 여기서 한기는 복수를 완성하거나 끝내버리지 않는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선화가 손님을 받는 방의 매직미러를 통해 그녀가 고통 받고 몰락하는 광경을 훔쳐본다. 그녀의 고통을 관음하는 한편 그녀의 고통을 미루고 막으려 들며 자신의 똘마니 명수가 그녀와 관계하는 장면 앞에서는 차마 직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다. 이때 카메라도 함께 시선을 떨궈버린다. 도대체 뭘 원해서 이러는 것일까? 애초에 그녀를 향한 복수는 그녀만을 향한 게 아니었던 것 같다. 길 한복판에서 자신을 짓밟은 불특정다수, 군중과 이 세계에 대한 원한 또한 뒤섞였던 것 같다. 그러니 그녀를 물리적강간하는 것보다 더 나아가 자신이 생활하는 밑바닥까지 끌어내린 계급적강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그녀와 이 세계에 원한을 품기 앞서 그는 벤치 옆자리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싶어 했다. 그는 그녀를 꿈꾸었거나 욕망했다. 그러므로 닿을 수 없는 그녀를 향해 황금모자를 쓰고 뛰어오르는 대신 그녀를 자신이 닿을 수 있는 밑바닥으로 추락시켜 버린 것이다. 개츠비는 범죄를 저질렀을지언정 부자가 되어 꿈속의 여인을 가진다는 그 세계의 암묵적인 룰에 충실했다. 한기는 그것마저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사악한 방식으로 세계의 질서 뿌리까지 훼손했다. 그래서 그 결과 그는 원하는 것을 얻었나? 여전히 그는 그녀에게 닿을 수 없다. 매직미러 너머에서 싸늘히 굳은 얼굴로 그녀가 다른 남자들과 관계하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그는 그녀를 원하지만 그녀 대신에 다른 창녀를 찾아가 해소한다. 알량한 죄책감이었을까? 아니면 혹시 개츠비에게 있어 데이지가 현실의 여자이기 이전에 자신의 거대한 꿈, 환상이었던 것처럼 그에게 있어 선화는, 선화이기 이전에, 선화를 만나기 이전부터 그가 품었던 닿을 수 없는 환상이 아니었을까? 개츠비는 현실의 데이지와 입 맞추기 전 잠시 망설였다. 한기는 망설임 없이 강제로 선화에게 입 맞추었다. 그런데 그 입맞춤은 충동적인 원한에 근거했기에 원한 밖의 뭔가가 남아서 그를 여전히 매직미러 뒤편 어둠속에 숨어있도록 만드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역시 그의 환상이 소멸될까봐 섣불리 복수를 완성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멸되지 않는 환상을 소유하기 위해 개츠비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는 한기가 묘한 마술과도 같은 능력을 발휘하는 장면들이 있다. 

 그는 말하지 못하지만 종종 말하지 않고서도 타인과 소통한다. 게다가 그의 침묵은 말보다 깊은 호소력으로 찰나에 깊은 속내까지 주고받는 게 가능한 것 같다. 선화가 창녀촌에서 도망쳤을 때 그녀를 미행하는 차안에서 한기는 선화가 얇은 옷차림으로 밤거리를 걷는 뒷모습을 응시한다. 그러자 마치 그의 시선과 의지를 대신하듯 갑자기 낯선 여인이 나타나 자기 겉옷을 선화의 어깨에 덮어주곤 앞서 걸어가 버린다. 당장 한기는 선화를 붙잡지 않는다. 선화가 스스로 돌아올지를 시험하듯 지켜보다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기 직전에야 그녀를 차안으로 끌고 와 버린다. 한기는 곧장 창녀촌으로 돌아가지 않고 선화를 외딴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데리고 간다. 납빛의 바다를 마주한 한기와 선화의 눈에 붉은 원피스 차림 여자가 나타난다. 여자는 바다로 걸어들어간다. 여자는 한기의 과거, 기억에 머무르는 존재인 것 같다. 그러니까 무슨 환상술사처럼 한기는 선화에게 말 대신 이미지로 자신의 과거 또는 기억을 전달한 것이다. 한기와 나란히 바다를 바라보고 앉은 선화는 바로 곁 모래에 묻힌 조각난 사진을 찾아낸다. 그 역시 한기의 뜻을 반영해 선화가 그 자리에서 발견하게끔 마술처럼 미리 준비된 것만 같다. 선화는 관객이 이해할 수 없는 한기의 사연을 이해했다는 듯 그에게 이제 그만 그 여자를 놓아주라고 말한다. 한기가 (그 여자가 아닌)자신을 놓아주지 않자 선화는 깨진 유리조각을 휘두르며 울고 몸부림친다. 

 영화가 마술이라면 영화 속 인물이나 사건, 환경에 그 마술적인 힘을 부여함으로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는 마술적인 힘을 한기에 한해서만 허용하고 있다.(흡사 한기가 곧 영화이고 영화가 곧 한기라는 듯) 영화는 여러 지점에서 한기의 시선과 감정, 그가 원하는 뭔가(욕망? 판타지?)와 붙어 있다. 앞서 매직미러를 통해서 한기가 선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카메라의 시점숏을 통해 영화와 공유되었다. 관객은 한기가 바라보는 선화를 영화 자체인 것처럼 바라보았다. 창녀촌으로 돌아와 한기가 다른 깡패에게 습격당했을 때, 처음은 벽돌에 찍히고 다음은 유리에 박혔을 때 두 번 모두 한기가 쓰러지는 장소는 선화가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앞이다. 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한기는 똑바로 선화를 올려다본다. 말없이 피 흘리는 그의 얼굴에 응답하듯 카메라는 선화의 얼굴을 리버스숏으로 되돌려준다. 처음 선화는 입을 가리며 놀라는 표정에 그쳤지만 두 번째, 유리에 박힌 한기 앞에 주저앉은 선화는 울음을 터뜨린다. 선화의 우는 얼굴을 쓰러져 누운 한기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쳐다본다. 그 모습 또한 오롯이 카메라는 담아낸다. 

 이걸 일종의 가학과 피학의 과정이라고 얘기해야 한다면, 그러니까 직접적인 가학과 간접적인 피학의 주고받음이라고 이름 붙여야만 한다면 말이다.(선화의 깨진 유리조각 대신 깡패의 유리판이 한기 옆구리에 박힌 것으로 받아들였을 때) 설령 그렇다 쳐도 그 가학과 피학이라는 것 역시 한기가 원했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한기에게는 그게 필요했던 과정이었음을 전후 장면들의 인과를 살펴보면 납득하게 된다. 바닷가에서 한기는 자신의 마음을 마술적으로 선화에게 전달했다. 선화는 이에 부응하듯 한기의 ‘조각난 사진’을 챙겨 와 창녀촌의 방에서 조각들을 이어 붙였다. 조각조각이 합쳐진 사진은 바로 그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나란히 끌어안은 남자와 여자의 모습, 그들의 얼굴은 구멍 난 채로 비어 있다.(남자의 얼굴만큼은 한기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 구멍난 사진을 선화는 매직미러(그녀에겐 단지 거울)에 붙인다. 이후 선화는 술 취한 한기를 침묵으로 받아주기도 하고 창녀촌 생활에도 차츰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와중에 앞서 말한 간접적피학의 과정이 사이사이 침투하여 선화라는 인물이 점점변화하고 있음을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더 큰 범위의 과정이 된다. 징후는 확증으로 밝혀진다. 한기가 살인을 저지른 똘마니 정태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그가 사형을 언도받아서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을 때, 감옥 밖에 남겨진 선화는 울부짖는다. 그녀는 증오할 수밖에 없는 그를 여전히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위해서 슬퍼하는, 괴로워하는, 울어주는 여자가 된 것이다.



 한기는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감옥에 따라 들어온 정태가 아슬아슬한 순간, 자신이 살인했음을 자백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렇게 되고 마는 논리가 허술하게 전개되지만 어쨌거나 한기가 정태 아버지의 수술비를 마련해줬음이 암시되었기에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앞서 정태는 한기의 매직미러 방에 들어간 유일한 외부인이었다. 한기를 제외하고 매직미러를 통해 카메라의 시점숏을 가졌던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한기)와 시선을 공유하여 매직미러 너머 한기와 선화가 있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런 정태를 위해 한기는 대신 죽으려 했고 그런 한기를 살리려고 정태는 자백했다. 이렇게 마치 분신과도 같은 뉘앙스를 띄는 정태 덕분에 살아 돌아온 한기는 다시 그 매직미러 방으로 들어간다. 매직미러 너머에서 선화는 매직미러에 붙여놓은 ‘구멍 난 사진’을 쳐다보며 눈물 흘리고 있다. 구멍 난 사진의 구멍을 통해 매직미러를 사이에 둔 한기와 선화의 눈이 마주친다. 마주보는 서로의 시선으로 구멍 난 사진의 ‘구멍’이 채워지자 비로소 한기는 라이터의 불을 켠다. 그 불빛으로 한기의 존재를 안 선화는 매직미러를 깨부순다. 한기는 매직미러 너머 선화가 있는 방으로 넘어간다. 카메라는 이제 한기의 시점숏도 아닌, 정태의 시점숏도 아닌, 영화라는 매직미러 자체로서 그 너머의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한기와 선화를 바라본다. 그런데 매직미러는 정확히 구멍 난 사진과 같은 공백으로 여전히 구멍 나 있고 바로 그 구멍을 통해서만 관객은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비록 그렇게나마 한기는 자신이 원한 판타지를 완성한 셈이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이미 하나의 영화는 완료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걸 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렇지만 그건 관객을 충분히 의식하는 영화였다기보다 오히려 그들의 시선과 잣대에 저항하려는, 한기와 시선과 그의 마술적 힘으로 영화의 시선과 영화라는 마술 자체와 하나로 합쳐진 하나의 주관적 세계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로지 그 하나의 주관이 목적하는 곳에 다다르기 위해 외부세계를 거부하고 밀어내면서 거침없이 노골적으로 직진해왔던 것이다. 즉 관객은 영화 속의 한기를 봐왔다기보다 한기라는 영화를 봐온 것에 가깝다. 그렇게 도착할 수 있었던 이 순간을 기점으로 이후의 영화는 달라진다. 매직미러의 너머로 넘어간 한기는 이제 영화 속 인물로서 관객을 의식한다. 그는 선화를 놓아준다. 그에게는 더 이상 선화를 놓아 줄 이유가 없어졌는데도 말이다. 선화는 그가 원했던 대로 그의 구멍 난 사진을 메우는 사진 속의 여자가 이미 되어버렸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는 선화를 놓아준다.

 영화처음 정각의 정지된 사진처럼 카메라가 바라보았던 그 시작이 되돌아와 다시 그 벤치에 선화와 한기는 나란히 앉아있다. 선화는 이제 한기의 손을 잡아준다. 한기는 그녀의 손을 놓고 그녀를 그 자리에 되돌려놓고 떠난다. 그러나 아무것도 되돌려놓을 수 없음은 그도 그녀도 관객도 모두가 알고 있다. 선화에게 집착했던 또 다른 남자, 한기의 똘마니 명수가 한기를 칼로 찌른다. 한기는 땅바닥에 엎드린 채 뱃속의 피를 게워내면서 죽어간다. 마지막까지 눈앞의 담배 한 개비를 갈구하면서... 그렇게 그냥 죽어버린다면 개츠비가 그랬던 것과 같이 자신이 갈구했던 꿈, 환상을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자신만의 판타지로 지켜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켜보는 누군가는 인과응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허나 정말로 그렇게 여긴다면, 그건 말도 안 된다. 복수를 끝마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만 여겨진다면 그건 말도 안 된다. 그가 진짜 원했던 것은 복수 그 이전부터 복수 그 이상까지였다. 이렇게나마 죄를 덜어낼 수 있고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비춰진다면 그건 기만이다. 한기는, 꿈틀거리며 다시 일어난다. 이제까지 벽돌에 찍히고 유리에 박히고 칼에 찔린 나쁜 남자는 불사신처럼 되살아난다. 죽음이 아니라면 더 이상 되돌아갈 곳은 없다. 되돌아가지 못하는 선화는 외딴바닷가의 모래사장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사진 속 여자처럼 붉은 원피스를 입은 그녀와 사진 속 남자와 같은 셔츠를 입은 나쁜 남자는 나란히 바다를 바라보고 앉는다. 정각의 정지된 사진처럼 카메라가 그들을 바라본다. 현재와 미래 사이에 살아있는 활동사진이 아닌, 사실상 과거에 죽어버린 그래서 더는 늙거나 병들거나 죽을 수도 부패할 수도 없는 그 이미지가 나쁜 남자의 나쁜 환상이 이르려 했던 곳, 원인과 결과 시작과 도착이 같을 수밖에 없는 장소였노라고 영화는 관객들에게 확인시켜준다. 

 이후의 에필로그 같은 엔딩은 실은 프롤로그이며 그렇게 되돌아와 멈춰버린 사진속 세계의 연장선이다. 거기에 카타르시스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거기서 찾을 수 있는 감정이 있다면 다만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배어나는 듯한 슬픔이다. 



 나는 이 영화를 세 번 보았다. 처음 봤을 때 나의 감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나의 감상이, 아니 다른 사람들의 감상이 나와 전혀 다를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 영화에 있어서만큼 사람들마다 감상의 극단적 차이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서 다시 보고 다시 보며 상이한 관점을 내 나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방식을 추측,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 영화에 빠져드는 것. 즉 영화에서 보여 진대로, 일어난 그대로, 현실을 모사한 이미지로서 현실의 논리와 가깝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때 관객은 영화를 생생한 리얼리티로 추체험하고 싶어하며 영화속 인물에게 다소 직관적으로 이입하려 시도한다. 설령 영화의 어느 지점까지는 그게 가능할지라도 점점 나아갈수록 그런 감상, 접근이 쉽지 않아질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한기라는 존재와 영화자체가 얽혀있는 주관적 세계로서의 실체가 노골화되기 때문이다.(여타의 다른 영화들처럼 그 실체를 숨기려거나 감추려 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래서 관객의 주관은 다른 노골적인 주관과 부딪혀 위화감을 느끼며 튕겨 나오고 마찬가지로 인물들에게 이입하거나 동의하지 못해 튕겨 나올 수 있다. 튕겨져 나온 관객들은 다른 식의 감상, 접근으로 방향을 틀겠지만 그러지 않는 관객도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현실의 논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영화의 부분은 일단 무의미로 배제하거나 대충 짐작하면서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일관하여 끝까지 가더라도 영화의 끝에서 카타르시스를 얻긴 어렵겠지만(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즉 영화가 긍정했건 부정했건 상관없이 관객 저마다의 결론으로 영화의 끝을 용서나 화해나 결론적으로는 사랑이라고 긍정한다면 말이다. 그게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것은 보여진 대로 일어난 그대로를 받아들였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관객 저마다가 그 이미지에 스스로 이름붙인 결과다. 여기서 만약, 스스로 영화에 빠져들었던 그 중의 한 관객이 스스로 영화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한다면, 그 나름으로 해석하고 긍정한 영화의 욕망을 현실에서까지 재생산할 만약의 가능성이 생긴다. 그가 범죄와 폭력을 따라하려는, 영화 이전에 이미 멍청한 관객이라고 가정해서가 아니다. 한기가 꿈꿨던 선화, 정확히는 사진 속 여자를 현실에서 불가능하지 않은 꿈으로 욕망해버렸을 때, 스스로 그게 얼마나 현실적이라 믿든, 그녀는 이미 성모(聖母)에 근접해 그 자체로 벌써 추상화된 존재다. 사람들은 성모에게 기도하지만 성모는 침묵으로 받아줄 뿐, 자신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성모가 아닌 사람에게 성모를 꿈꾸거나 기대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 본인도 고통스러워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도 가끔은 그런 걸 꿈꾸지만 그래서 영화를 보는 것이다. 영화는 결국 꿈이니까.


 2. 그러므로 꿈의 논리에 가깝게 받아들이는 것. 다시 말해 나는 모든 영화는 결국 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꿈속에 온전히 빠져있는 사람에게는 현실처럼 느껴질 것이다. 꿈속에서 이게 꿈이라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자각한 관객은 자각몽으로서의 영화에 꿈의 논리를 끌어들이게 된다. 꿈의 논리는 현실과 다르게 현실적 제약보다는 주체의 욕망이 강한 힘을 발휘한다. 관객은 화면에 투사된 자신의 욕망을 감지하고 그것과 공명하는 영화(꿈)의 욕망이 어디로 흐르는지를 감지하게 된다. 자신의 욕망에 덧입혀진 이미지를 따라가며 관객은 영화와 영화속 인물들의 욕망을 이해하고 그들과 더불어 추체험하고 그들에게 이입하는 동시에 관객 스스로의 욕망을 이해하고 성찰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상당 부분 숏과 씬과 시퀀스의 논리가 한기라는 인물의 꿈처럼, 꿈의 주체로서 그가 욕망하는 꿈의 논리로 향하고 있다. 현실의 논리를 벗어난 영화 속 이미지들도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뿐만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자각몽을 자각케 하는 몇몇 장치들이 놓여있다. 매직미러나 ‘구멍 난 사진’과 같은, 그것들은 자신만의 꿈에 도취된 자가 생산하기에는 너무 많은 함의를 불러일으키는 메타포이며 그 메타포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와 거리를 두고 영화 속 인물과 자신을 관조하고 성찰하도록 이끄는 특별한 ‘꿈신호’로서 작용한다. 물론 영화를 보면서 관객 자신까지 성찰한다는 것은 조금 난감한 일이다. 나조차도 딱히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인간은 아니라서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영화를 보는 일은 적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만약 영화와 기본적으로 교감하지조차 못한다면, 영화를 나 자신의 것이기도 한 꿈으로서 조금도 받아들일 수 없고 그 결과 영화와 관객이 서로를 주체가 아닌 타자로서 밀어낼 수밖에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은 애초부터 어려워진다. 관객은 또 다시 영화로부터 튕겨져 나온다. 


 3. 1에서 튕겨져 나온 관객들과 2에서 튕겨져 나온 관객들 중 다수는 여기로 방향을 잡아 직진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현실 같지도 않은 이 영화가 창작자 개인의 현실, 사적경험을 수록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개꿈 같은 이 영화가 창작자 개인의 아주 내밀한, 비밀스런 꿈의 논리에서 비롯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전자는 현실에서 확인된 정보를 보유하지 않는 한 관객의 창작자 개인에 대한 상상으로 그칠 것이다. 후자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관객이 스스로의 내면과 피드백을 주고받는 대신 일방적으로 타인의 내면을 해석해버리고 아무런 피드백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더구나 관객 모두가 심리학자는 아닐 텐데, 심리학자를 자처하는 관객은 환자와 만나본 적도 없고 대화해 본 적도 없다면, 결국 확인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는 마찬가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화를 보며 쉽게, 흥미롭게 창작자 개인을 상상한다. 나도 마찬가지다.(미국의 유명작가의 소설과 삶을 간접적으로 연루시킨 것처럼. 또 한국의 유명작가 법명을 언급한 것처럼. 전자는 오래 전 고인이 되어 소량의 전기적 사실만 접했을 뿐 나는 그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후자는 최근 욕을 먹는다고 들었는데 그 역시 창작활동에 임하는 작가라는 사실 말고는 그의 내면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계가 없는 것일까? 관객은 영화라는 매직미러를 통해 그 이미지를 감상하는 것으로 모자라 매직미러 너머에 존재하는 한 인간을 관음하고 싶고 저마다 마음대로 상상하고 규정하고 정의내리고 싶어한다그래서 그 매직미러 너머에 있던 한 인간이 고통스러워하다가 차라리 자신의 주먹으로 매직미러를 깨부수고 정면으로 관객과 눈을 마주보고 싶어졌다면그런데도 그 시선마저 회피한 관객은 그에 대해서 계속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면과연 그 악순환에 끝은 없었던 것일까끝은 있다누구에게나 끝은 다가온다지금 그 매직미러 너머에는 아무도 없다매직미러 가운데 캄캄한 구멍만이 뚫려있을 뿐이다.


 개츠비가 죽기 전,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실체에 대해 많은 이들이 많은 것들을 얘기했다. 파티장에 떠돌던 무성한 소문들 중 어느 것은 진실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티장을 채웠던 그들 중 누구도 그의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상상한 게 맞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는 인정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개츠비가 아닌, 그와 무관한 삶을 살았던 한 사람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참 많은 것들을 얘기했다. 누군가는 혐오스러운 영화를 만드는 혐오스러운 인간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위대한 영화를 만드는 위대한 예술가라고 했다. 누군가는 결국 성범죄자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건 혐의가 없음으로 밝혀졌다고 했다. 그러자 또 누군가는 밝혀지지 않았을 뿐 법을 피해 달아난 비겁한 자라고 했고 그러자 누군가는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사실로 믿을만한 소문이 있다고 다른 누군가가 반박했고 또 다른 누군가가 또 다른 소문을 들고 나왔다. 어쩌면 그 수많은 얘기 중 어느 것은 맞았을지도 모른다. 또 틀렸을지도 모른다. 헌데 그 수많은 누군가들이 얘기하는 그 누군가는 대체 누구였을까? 상관없다. 적어도 한 사람에게 있어선, 더 이상은 말이다. 나에게도 별 상관없어졌다. 나에게는 나쁜 꿈을 꾼 나쁜 남자에 대한 영화 한 편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든 그 영화는 이미 나에게 속해있는 한 편의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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