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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6. 2021

<런던의 늑대인간>

존 랜디스, 1981


 남성

 섹스

 남성의 억눌리거나 왜곡된 성욕

 잠재된 폭력성

 거대한 시스템 또는 국가... USA?


 이런 것들은 내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를 보면서 곧잘 떠올렸던 단어들이다. 물론 그 밖의 영화들도 이 비슷한 것들의 알레고리로 해석 가능하지만 특히 큐브릭의 영화들에서 또렷하게 전해져온다. 그는 참으로 일관성 있는 감독이다. 가끔 그의 영화들은 비평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느끼는데 왜냐면 영화 내에서 이미 비평이 끝나있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그의 어떤 영화들도 영화 자체로서 모호하지 않다. 선명하고 분명하고 확고하다. 큐브릭은 영화를 만들 때마다 그 영화를 통해 무엇을 탐구하고 싶어 하는지 정확하게 질문했었던 것 같다.


 큐브릭이 좋아했다던 오래된 호러영화 한 편을 찾아보았다.


 -The Slaughtered Lamb

 회색 하늘, 산등성이를 흘러가는 구름. 영국의 시골 산간지방을 가르는 도로를 타고 트럭 한 대가 달려온다. 트럭 짐칸에는 양 수십 마리와 미국인 대학생 두 명, 잭과 데이빗이 실려 있다. 트럭에서 내리며 잭은 운전기사에게 양들이 예쁘다고 칭찬한다. 트럭을 떠나보내며 잭은 양들에게 인사한다. "바이 걸스" 바람소리만 윙윙대는 황량한 벌판을 나란히 걸어가면서 잭과 데이빗은 여자에 관한 농담을 주고받는다.


 마을을 찾아 'The Slaughtered Lamb'이라는 간판이 걸린 펍으로 들어간다. 잭과 데이빗이 들어선 순간 펍 안의 모두가 입을 다문다. 사람들은 이방인을 반기지 않는다. 잭과 데이빗이 여행 온 미국인이라는 걸 알고서 미국을 비아냥대는 농담을 하며 저희들끼리 낄낄댄다. 잭이 그들의 심기에 거슬리는 질문을 하자 두 미국인 대학생을 위협하다시피 내쫓는다.


 이후로 어두운 벌판을 걸어가는 잭과 데이빗, 그리고 펍 안에 남은 사람들 모습이 교차된다. 잭과 데이빗은 비를 맞으며 수다를 떨며 묵을 곳을 찾는다. 펍 안에서 마을 사람들 일부는 미국인 대학생을 걱정하고 다른 이들은 무시하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오늘밤 이곳에서 밖을 돌아다니는 게 위험함을 알고 있다. 어느새 길을 벗어난 잭과 데이빗은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캄캄해서 보이진 않는데 뭔가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발길을 돌려보지만 역시 보이지 않는 무엇이 어둠 속에 버티고 있고... 잭과 데이빗은 포위당했음을 깨닫는다.


 -코미디와 호러

 잭은 죽었고 데이빗은 구조되었다. 병원에서 깨어난 데이빗은 잭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기억한다. 잭이 물어뜯길 때 자신은 도망쳤다는 것도 기억한다. 허나 죄책감이나 공포를 내색하진 않는다. 데이빗의 얼굴 표정은 태연하다. 그의 꿈에서 얼굴 반쪽이 너덜너덜해진 잭이 나타나 데이빗에게 경고한다. 너는 곧 야수로 변할 거고 니가 아끼는 사람들을 헤칠 것이라고 그러니 당장 자살하라고 말이다. 데이빗은 싫다고 하며 둘이서 예전처럼 투닥거린다. 데이빗은 내내 악몽에 시달리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아무렇지 않으니 영화도 줄곧 유쾌하고 태연한 분위기를 가장한다. 등장하는 캐릭터마다 영국스런 위트가 섞여있으며 병원의 일상은 마치 아기자기한 영국 시트콤 같다. 시트콤은 아리따운 간호사 알렉스가 데이빗을 간호함으로서 한층 더 즐거워진다. 알렉스의 캐스팅, 제니 어거터는 간호사 코스튬에서 최대한의 성적매력을 발휘하는 캐스팅이다. 평상복 차림의 그녀는 평범한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다. 물론 데이빗에게 가장 매력적인 쪽은 아무 옷도 걸치지 않았을 때겠지만... 곧 그 모습을 데이빗은 볼 수 있게 된다.


 -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David'?

 그녀 알렉스가 먼저 데이빗에게 끌렸다. 왜일까? 알렉스가 병원의 다른 꼬마환자를 다정하게 보살피는 장면이 두어번 나온다. 이 '남자'꼬마아이는 알렉스가 뭐라고 질문하든 장난스럽게 노, 노라고만 대꾸하는데 노, 노 거리는 발성이 새끼짐승이 짖는 것 마냥 연출되었다. 친구의 죽음으로 악몽에 시달리는 데이빗을 알렉스는 단순히 모성애에 이끌려 좋아하게 된 것일까? 어쩌면 알렉스는 데이빗이 야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게 아닐까, 라고 나는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나쁜남자, 여자를 매혹시킴과 동시에 괴롭히는 고전적 나쁜남자 유형은 여자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일종의 묘한 두려움까지 풍긴다. 그 연민이 나약함으로 전락해선 안 되고 두려움은 폭력으로 표출되어선 안 되겠지만... 그 미묘한 밸런스에 남녀 간 가학성과 피학성이 은신해왔고 영화라는 꿈을 통해서는 곧잘 노골화되어왔다. 최근 <팬텀 스레드>같은 경우처럼 남녀가 바뀔 수도 있으며 동성 간이라 해도 공수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

 데이빗이 야수로 변신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늑대인간이기는 하되 늑대가 아닌 인간의 외양으로 남았다면 말이다.

 데이빗과 알렉스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데이빗이 엉뚱하게 작가가 되겠답시고 글도 제대로 못썼다면 <샤이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미처 결혼하기 전 베트남으로 징병 당했다면 <풀메탈재킷>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전쟁에서 돌아와 휠체어신세가 되었다면 세 번째 다리 대신에 오른손을 솟구쳐 올리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농담같은 비약이지만 이렇듯 '폭력'과 '섹스'는 영화의 왼손과 오른손을 붙잡은 영화의 가장 익숙한 친구들이며 종종 어떤 영화들은 두 친구가 서로 손을 맞잡도록 도와 잠재된 폭력과 표출된 성애 간의 이상한 관계를 지켜보기도 한다. 그런 영화들은 스스로가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비교적 솔직하게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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