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2007, 2010, 2018
밀양의 신애는 너무나 안타깝고 비극적인 인물이지만
이창동 영화의 많은 인물들이 그렇듯 그 자신의 모순을 안고 있다.
그녀는 자기서사를 꾸며내고 스스로 그걸 믿으려는 여자인데(비극을 겪기 이전에도)
그러므로 그녀가 겪게 되는 비극이 더 견딜 수 없어지는 건
그 비극에 자신의 거짓말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견딜 수 없기 때문)
결국 그녀는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궁극의 거짓말? 신과 대결하게 된다.
원래 각본상에서도 신애가 저수지에 들어가서 자살시도하며 끝까지 보이지 않는 신과 대결할 예정이었지만
촬영상의 사고로 다시 찍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각본이 수정되어 사과를 베다 손목을 가르고
이전까지 불신하고 불화했던 사람들, 이웃들에게 살려 달라 호소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시의 미자도 귀여운 소녀 같은 할머니지만
한편으로는 현실감각이 결여된, 현실에서는 종종 무시받을 수 있는 인물이다.(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시 쓰기를 배우는 과정에서도 하늘과 나무의 꽃들을 올려다보며
예술에는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쁘고 아름다운 게 필요해서 애초에 시 쓰기를 시작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점점 더 그게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된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나 조금씩은 자기 자신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보고 싶어하고
자기 삶을 윤색하고 싶어 한다. 그게 꼭 나쁘다고 할 수만 없는 게 그런 환상적인 영역조차 없다면 현실은 너무나 냉담하고 삭막할 뿐이다.
버닝의 해미는
물론 원작이 있고 각색도 오정미 작가가 먼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창동적인 인물의 특징이 어느 정도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더 극단화되었다고도 볼 수 있고.
그런데 해미도 완벽한 4차원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 종종 드러나는 그녀의 울먹이는 표정은
스스로도 그렇게 믿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인상을 전한다.
귤이 없다는 걸 잊듯 돈이 없다는 걸 잊고 행복하게 아프리카로 떠나고 싶어 하고
자기가 그들보다 가진 게 없다는 걸 잊고 그들(벤의 친구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어울리려 한다.
나는 해미가 나름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믿는 방식을 믿으려고. 하지만 결국 그녀도 외톨이였다. 미자나 신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