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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Sep 17. 2022

오후의 꼬리

나는 아주 넓은 방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방은 얼마나 넓은지 끝나는 곳이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는 두툼한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데 이상하게 소음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아주 느리고 평화로웠다. 햇빛이 창가의 두툼한 커튼 틈 사이로 넘어들어오고 있었다. 문득 이곳은 아주 오래된 호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는 오래된 호텔에서 오래간 혼자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 사람의 기분이 되었다. 호텔에는 투숙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발목 언저리 즈음에 고여 있었다. 고인 시간을 청소기가 빨아들였다가 뜨거운 한숨처럼 길게 내보냈다. 청소기 헤드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시간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담배를 한 개비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도, 연기도, 담배 끝에서 떨어지는 재도 햇빛을 받으며 공중에서 궤도를 그리다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어쩐지 그리운 생각이 들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주 멀리에서부터, 넓은 방이 끝나고 긴 복도가 시작되는 저 멀리에서부터 희미하게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나 멀리에서부터 들려오는지 그곳에서는 시간조차 다르게 흘러 이른 새벽이거나 한밤중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아직 만나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왔다.

문득 복도가 시작되는 곳에 레코드 플레이어가 하나 있었음을 기억하고 그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진 오후 속을 걸어 나는 복도 끝에 도착했다. 기억대로 레코드 플레이어는 그곳에 있었지만 그 위에 판은 올려져 있지 않았다. 음악은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조금 더 슬프게 들렸다. 슬픈, 매우 슬픈 음악이다. 텅 빈 방과 보풀이 인 두툼한 카페트와 어울리는 음악. 햇빛이 소리 없이 의자 다리 쪽으로 기지개를 켜는 오후에 어울리는 음악. 이제 곧 첫 번째 투숙객이 도착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춤을 춰야지. 허리에 팔을 감고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두툼한 카페트 위에서 몸의 무게중심을 오른쪽에 실었다, 왼쪽으로 실었다 하며 조각배처럼 춤을 출 것이다.

누군가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호텔 지배인이었다. 그는 두툼한 배 위로 흰 와이셔츠를 입고 팔 아래 레코드 판 하나를 끼고 있었다. 시내로 나가서 판 하나를 구해 왔지. 그가 말했다. 지배인은 종이로 된 슬리브에서 둥근 레코드 판을 꺼내 조심스럽게 플레이어 위에 얹고 바늘을 올렸다. 오후 내내 허공을 맴돌던 음악이 한 겹 더 선명하게 얹혀 흘러나왔다. 오후의 농도는 더욱 진해졌고 시간은 이제 마멀레이드 잼처럼 굳어져 더욱 느리게 흘렀다. 커튼 너머로 스미는 오후의 햇살 속에서 우리는 춤을 추었다. 허리에 팔을 감고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아주 천천히, 소리없이. 오후는 그렇게 영원했다.


https://youtu.be/f6I6TjWmm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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