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서울 한복판을 외국인처럼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도시의 모든 빛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상한 밤이었다. 걸으면서 서울이 뉴욕 같거나 긴자 같아지는 순간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로비가 넓은 호텔의 회전문을 지나고 동아일보 건물을 지나고 교보문고 건물을 지나고 동화면세점 건물을 지났다. 큰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을 지났다. 짐 더미 사이에서 그림자처럼 잠든 노숙인을 지났다. 놀란 마음이 덜컹거리는 찰나의 순간 서울은 더 이상 긴자나 뉴욕같지 않게 되었다. 다시 포시즌즈 호텔과 웃음기 많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지났다. 광고 전광판의 빛이 맞은편 고층건물의 외벽에 나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보았다. 종로 1가와 2가와 3가와 4가와 5가와 6가를 지났다. 버스 정류장들이 다 이렇게 단순하게 이름 지어지면 편리하겠네, 하고 생각했다가 이내 나는 인덕원이라는 이름과 길음이라는 이름과 모란이라는 이름이 좋으니까, 그러나 실제로 그곳에 살아보면 이름들은 곧 광채를 잃고 묵직하고 덥고 떼어내버리고 싶은 것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그곳이 인덕원이거나 길음이거나 모란이어서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밤 버스는 광장시장을 지나고 전자올겐과 아코디언을 파는 가게를 지나 올리브영과 YBM과 노란 포장마차의 불빛과 당구장 건물의 빨갛고 파랗고 초록색인 LED를 내게 보여 주었다.
버스에서 내릴 즈음이 되자 비로소 눈 대신 귀가 열렸다. 내릴 정류장을 안내하는 방송과 섞여 라디오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아는 듯 모르는 듯한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꿈에서 들은 것 같은 멜로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