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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Feb 12. 2022

놀이터

어젯밤 묻은 상자가 없다.

눈앞이 순간 새까매졌다. A는 아예 놀이터 바닥에 철퍼덕 앉아 모래를 박박 파내기 시작했다. 손톱 밑으로 차가운 흙이 끼고 작은 돌멩이가 손끝을 찔렀다. 더 파내어지지 않을 때까지 모래를 헤집었지만 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스팔트에 분필로 마킹한 x자 마크는 누군가 신발로 문댄 것처럼 흐려져있었다.

무지개 소용돌이가 들어있는 유리구슬, 반짝이 색종이로 접은 인형 옷, 커튼 집게에서 떼어낸 햇님 모양 장식과 지점토 고양이와 직접 만든 작은 사람들. 상자 속에 담긴 것들은 A가 수집한 세계였다. 세계를 도둑맞은 날 학교 점심시간의 소음이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들려왔다.

A는 몸을 일으켜 흙으로 얼룩진 무릎을 털었다. 종종걸음으로 교실로 돌아가는 내내 심장이 까맣게 쿵쿵 뛰었다. 무언가를 도둑맞은 것은 처음이었다. 묻은 장소를 착각한 것일까? 아니면 보물을 묻는 모습을 누군가 보고, 아무도 없는 틈을 타 파낸 걸까? 차라리 밤새 땅 속으로 가라앉아버린 거라면?

복도 끝에 도착하자 교실 뒷문으로 들어가는 B의 모습이 보였다. B를 붙들고 우리 보물을 도둑맞았어!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5교시 시작의 종이 울리고 학생들은 일사불란하게 자리에 앉았다.

전학생 A는 친구가 없었지만 손재주가 좋아 쉬는 시간마다 혼자 자리에 앉아 이것저것 만들었다. 지점토 고양이, 휴지를 꼬아서 만든 사람, 헝겊으로 만든 인형옷. B는 점심시간마다 의자를 돌리고 앉아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는 A를 구경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둘은 친구가 되었다. B는 소중한 것이란 땅에 묻어야 한다고 했다. A는 둘만의 비밀이 생기는 게 기뻤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누구도 찾을 수 없는 비밀 장소로 가는 지도를 그렸다. 종이 위에 그린 꼬불꼬불한 화살표는 복도부터 급식실, 화단, 놀이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보물상자를 묻을 스팟에는 크게 X자를 그렸다. 수국이 무성하게 핀 덤불의 아스팔트 옆, 모래흙이 시작되는 곳을 둘은 모종삽으로 깊이 팠다. 그리고 소중한 상자를 아래로 내려보냈다.

100년 동안 여기 묻어두는 거야.

지구가 끝나고, 우주가 끝나고, 둘의 반짝이는 세계가 공룡 화석 틈에서 발견되는 그날까지. 상자를 묻고 돌아온 날 수업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A의 시선은 놀이터 덤불 쪽을 향했다. 아스팔트에 새긴 분필 자국은 교실 창문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곱셈 기초를 배울 차례였다. 햇볕이 창문을 타고 넘어와 수학 교과서 페이지의 반질반질한 종이 위까지 드리웠다. 2분단 중간, B가 앉은자리에서는 놀이터 옆 수국 덤불이 보였다. 올여름에도 흰 꽃이 다투듯이 피어, 햇빛을 받아 불타오르는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B는 창가에서 고개를 돌려 교과서에 얼굴을 묻었다. 연필 끝으로 끝없이 곱셈 기호를 그렸다. 눈을 감아도 햇빛이 파랗게 눈꺼풀 안쪽에 X자를 남겼다. 집에 돌아와 B는 책가방을 벗어놓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색종이로 접은 장미와 동네 문구점에서는 팔지 않는 별 모양 비즈, 삼색 유리구슬, 지점토 고양이 위로 하나하나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하나같이 섬세한 빛을 뿜고 있었다.

B는 울고 싶었다. 오후의 햇빛이 방의 커튼에 드리웠지만 온 세상이 깜깜하게 어두워진 듯했다. 세계를 훔친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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