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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Feb 26. 2022

봄과 묘지

3년 전 봄은 공중에 중 떠 있는 시간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처음으로 마감 기한이란 게 없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갈등으로 점철된 집안 사정과 맞물려 하루빨리 집을 떠나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알바를 하고 돌아와 매일 밤 이력서를 썼다. 밤을 새우며 작업해 집중력도 흐려지고 자꾸 어딘가에 부딪혔다. 왜 그렇게 조급했는지 되짚어보면, 아마 봄이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시간이 미로처럼 느껴졌다. 잘못된 문을 열면 영영 틀린 길로 들어서 돌아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앞으로의 내 인생의 미로가 어떤 모양새로 흘러갈 예정인지, 조감도로 바라보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다 드디어 번아웃이 온 나는 이력서 세 장을 제출해놓은 상태로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여행 첫날 나는 전망대에 올라갔다. 52층 통유리창을 통해 내려다본 도시는 아주 정교한 미니어처처럼 보였다. 구름의 속도에 맞춰 건물들의 면면이 밝아졌다가 다시 그늘이 드리웠다. 가만히 집중해서 내려다보면 도시를 이루는 미세한 움직임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고가도로를 따라 흰개미처럼 움직이는 자동차들, 신호등에 따라 멈췄다가 달렸다가 하는 트럭, 학교 운동장에서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체조를 하는 점처럼 작게 보이는 아이들... 그러다가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도심 한복판에 운동장보다 수십 배는 큰 빈터가 있었다. 도시를 틀로 꾹 눌러놓은 것처럼 넓고 납작한 빈터였다. 저기를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향을 잊어버리기 전에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에서 내려와, 무턱대고 대충 한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는 선명하게 보였던 조감도는 이내 택시와 사람들과 높은 건물에 가려 더 이상 어느 쪽이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밤에 숙소에 돌아와 인터넷 지도를 켜고 검색해본 알게 되었다. 전망대에서 본 빈터는 아오야마 영원이라는 거대한 시립 공동묘지였다. 특히 봄마다 벚꽃이 피어 아름답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묘지에서는 오감이 한껏 증폭된다. 특히 청각이 그렇다. 외부인이 침입하기 전의 묘지는 진공의 막으로 싸인 것처럼 조용하기 때문이다. 고로 그 진공을 뚫고 발밑으로 나뭇가지와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 자갈의 소리, 갑자기 나무에서 날아오르는 새의 소리... 살아있는 것들의 현재성이 손에 잡힐 듯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맑은 날이었다. 햇볕이 머리카락을 스칠 때마다 눈가에 무지갯빛 막이 드리웠다. 제각각 다른 모양과 크기로 빼곡하게 늘어선 비석들은 그 자체로 작은 도시처럼 보였다. 산 사람들의 도시에서는 지금 이 시간쯤 사람들이 열심히 도시락을 먹거나 오전 업무를 마무리하고 삼삼오오 엘리베이터를 잡을 것이다. 그러나 죽은 사람들의 도시에서는 타오르는 봄볕과 폭발하듯이 피어난 벚꽃만이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듯 소리 없이 머물러 있었다.

고백하자면 그해 봄에는 벚꽃이 피는 게 무서웠었다. 또 기약 없는 한 해가 시작되는구나, 이룬 것 없이 벌써 겨울이 다 갔구나. 벚꽃이 필 때까지는 무언가를 완성하고 싶었데. 불안한 내 마음도 모르고 거리 양옆에서 흐드러진 벚꽃이 속절없이 야속했다. 하늘이 맑고 푸르러질수록 마음은 조급해져만 갔다.

조용한 묘지에 핀 벚꽃을 보며 이젠 정말 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몇 달만에 이상하게 편안한 마음이었다.


지금도 봄에는 여전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웃고 싶다가 울고 싶고 아무도 없는 청계천을 따라 걷고 싶고 하루아침에 눈부시게 폭발하듯이 핀 벚꽃을 감탄하면서, 쳐다보는 게 촌스러울까 봐 무심한 듯 앞만 보고 걷다가 아무도 없을 때 빠르게 사진을 찍고 싶다. 두 발이 땅에 닿은 지금, 봄은 훨씬 친절한 계절이다.


봄볕은 손을 많이 타 둥글어진 나무의자의 뭉툭하고 부드러운 느낌처럼 찾아온다.


Akiko Yano - Sprink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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