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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Mar 24. 2024

밤의 재구성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도시의 전파를 교란하고 공기를 기이한 에너지로 채우는 비였다. 오후쯤 되자 차원 사이를 가르고 있던 벽까지 눅눅해졌다. 비는 곧 눅눅한 벽지를 뚫고 쏟아지는 물처럼 다음 차원으로 이동할 것이었다.


모나

라스베이거스의 오후는 찜기 속처럼 후텁지근했다. 구도심의 낮은 스카이라인은 윤곽을 잃고 어둑해지는 하늘 속 아래 퍼져 있었다. 담에 붙은 전단지가 습기를 머금고 축 늘어졌다. 오후 여섯 시쯤 되자 찜통 속을 가르듯 비가 내렸다. 이내 천둥번개가 뒤따랐다.

초조해진 모나는 진주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도시를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택시는 벌써 몇십 분째 도로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비행기 탑승수속 종료까지 한 시간 반. 차들이 앞뒤로 빵빵거리는 소리가 물을 먹은 채 들려왔고 메트로놈처럼 움직이는 와이퍼가 비 오는 풍경을 툭툭 끊었다. 택시 운전자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핸들만 잡고 있었다. 그는 어딘가 영화배우를 닮았다. 주연배우가 아니라, 영화 속에서 택시기사 역을 맡을 법한 사람처럼 정말 '택시 기사처럼 생겼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그는 완벽한 택시 기사의 얼굴을 가졌다. 택시의 FM 라디오에서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도시 교도소에서 탈출한 무장 강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경찰들은 검은 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용의자를 쫓고 있다고 했다. 제아무리 무장 강도래도 이 빗속에선 차편으로 도시를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모나는 머릿속에서 강도의 몽타주를 그려보았다. '완벽한 무장 강도'의 얼굴은 어떻게 생긴 얼굴인가... 그러나 남의 얼굴을 상상해 보려는 것은 쉽지 않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눈을 감고 떠올려보려면 어렴풋한 인상만이 있을 뿐, 이목구비 중 무엇 하나도 정확하게 그려낼 수 없듯이...


이어서 기상속보가 흘러나왔다. 폭우로 인해 일시적으로 항공편 운행을 중지하며, 도시에서 나가는 모든 비행편은 결항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택시 운전자는 백미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갓길로 빠져서 시내로 들어가, 뜨거운 커피나 한 잔 사 마시고, 부은 발에 얼음이라도 올리고 호텔에서든 모텔에서든 하루 묵으쇼. 이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표정에 영화배우 같은 설득력이 있었다.


두어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모나는 도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루 종일 구두 속에서 뜨겁게 부어오른 발을 한 짝씩 이끌고 호텔 프론트에 섰다. 천장은 높고 폭은 좁은, 전체적으로 기다란 프론트는 어울리지 않게 키 큰 식물들로 꾸며져 있었다. 작은 땡,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드디어 모나는 혼자가 되었다. 장장 반나절만에 찾아온 고요였다. 습관적으로 옆으로 돌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지쳐 보이는 얼굴을 감싼 까만 단발머리 틈에서 진주 귀걸이가 반짝였다. 엘리베이터가 한 층씩 올라갈수록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텔 방은 크지도 작지도, 넓지도 좁지도 않았다. 팔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고급 비옷을 침대에 벗어두고 불을 켜려다가, 창문 유리가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점멸하는 것을 보았다. 어두운 방을 가로질러 창문에 얼굴을 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방 바로 아래층의 외벽에서 큰 카우보이 모양의 네온 조명이 총을 들었다, 놨다 하며 깜박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창가 의자에 걸터앉아 타인의 삶 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 속에 잠겼다. 그러나 생경한 기분은 금세 사라지고,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한 번도 나간 적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깜박이는 네온의 불빛이 감은 눈 뒤로 점멸했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민영

"죄송하지만, 지금은 얼음이 다 떨어졌습니다."

프런트 직원이 수화기 너머로 대답했다. 다소 귀찮은 듯한 어조가 서려 있었다.

민영은 잠시 멈칫했다.

"그럼 혹시 채워지는 대로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 819호로요.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과하게 부탁하는 투로 말한 것이 후회되었다. 민영은 남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것이 어색했다. 마땅히 요구할 만한 것들에 대해서도 그랬다.

민영은 음소거해 둔 TV로 다시 눈을 돌렸다.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를 재방영하고 있었다. 단정한 단발에 고급스러운 장신구로 꾸민 여주인공은 혼자 택시 뒷좌석에 앉아 있다. 그녀의 비행기는 폭우 때문에 연착될 것이고, 비행기를 놓치면 집에 돌아갈 수 없으니까 근처의 숙소를 잡고, 그곳의 전화기를 이용해 남편에게 전화를 걸 것이다, 미안하지만 며칠 늦을 것 같아...... 이를 틈타 그녀의 남편은 이웃집 여자와 외도를 하거나 뒷마당에 살인 사건의 증거를 묻거나 그녀 몰래 전 재산을 탕진하며 도박을 하거나...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뒷이야기가 정확히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음소거를 끄자 소리가 화면 속으로 다시 밀려들어왔다. 주인공이 탄 택시의 운전자는 백미러로 진주 귀걸이를 한 주인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갓길로 빠져 시내로 들어가, 뜨거운 커피나 한 잔 사 마시고, 호텔에서든 모텔에서든 하루 묵으쇼." 택시 운전자가 손님에게 쓸 만한 말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민영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나 드라마 속의 택시 운전수들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도 되는 걸 지도 모른다. 드라마 속의 인물들은 언제나 현실의 사람들보다 어딘가 더 어색한 방식으로 말하니까. TV 드라마를 볼 때마다 그녀는 배우들의 입만 바라보게 되었다. 맡은 배역에 어울리는 완벽한 얼굴과, 그 한가운데 붙은, 쓰여진 말을 성실하게 외우는 입 - 그 입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보면 채널을 돌리고 싶었다.

민영은 채널을 돌렸다. 세탁세제 광고와 보험 광고를 지나 뉴스 속보가 나왔다. TV 속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아나운서가 시립 교도소에서 탈출한 무장 강도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무장 강도의 예상 도주 경로가 빨간 화살표로 지도에 표시되었다.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탈출한 무장 강도는 무장 상태인가 아닌가. 입소할 때에 옷가지와 무기를 모두 압수당하는 것이 아니었나.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닌가.

어디선가 작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파리 소리처럼 작다가 이내 거슬릴 만큼 선명하게 들려왔다. 전기가 흐르듯이 공명하는 소리였다. 민영은 침대에서 일어나 벽에 귀를 대어보았다. 오른쪽 벽과 화장실 환풍기 옆, 옷장 안까지 따라 걸으며 귀를 대어보았지만 소리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소리의 근원 찾기를 포기하고 가만히 다시 침대에 앉았다. 문득 미간에 힘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그럴 때마다 미간에 힘 좀 풀어, 주름 생겨. 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남편은 여기에 없다. 그러니 아무렴 어떻단 말인가... 그리고 주름이 좀 생기면 어떻단 말인가...

문득 지금 남편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묘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웅웅거리는 전파 소리 속에서 그녀는 생각했다. 이게 다 얼음이 없기 때문이다. 얼음이 없어 위스키를 마시지 못해 취하지 못한 민영은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호텔 프런트를 연결하는 번호를 눌렀다.


줄리아 로버츠

줄리아 로버츠는 호텔 화장실에 서서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의 얼굴이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얼굴의 굴곡을 비추는 조명의 낯선 각도 때문일지도 모른다. 틀어 놓은 심야 라디오에서 단막극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막극의 여주인공은 벌써 다섯 번째 로비에 전화를 거는 중이다. 배역을 맡은 배우의 모놀로그는 일상적이고 건조했다. 그녀는 그런 풍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다. '슬라이스 오브 라이프 (slice of life)', 일상의 단면. 그 말도 그녀는 좋아했다. 지름이 아주 크고 크러스트가 단단한 파이를 구워, 톱날이 있는 칼로 슥슥 잘라 한 조각 내놓은 것 같은 이미지였다. 파이는 삼삼한 맛일 것이고 가끔씩 다시 생각날 것이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속에서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그런 것도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다면) 주인공과 그녀의 연인은 행선지가 엇갈린다. 연인은 주인공이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는 비행기에 탔다고 착각하고, 공항으로 달려가 급하게 같은 항공편 티켓을 구매한다. 연인이 주인공을 찾아 기내 안까지 들어간 사이 비행기는 그를 태운 채 이륙해 버리고, 하늘 속으로 멀어지는 비행기를 담은 장면이 길게 보여진다. 같은 시각 주인공은 비행기가 아닌 한 해변가에 앉아 있다. 해변가에는 약한 바람이 분다. 모자가 바람에 날려가려 하자 주인공은 그것을 지그시 누른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슬라이스 오브 라이프.


줄리아 로버츠는 라디오를 끄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방 안을 서성거리다가 커튼을 젖혔다. 맞은편 건물의 외벽에 붙은 거대한 네온사인이 빗줄기 너머로 비쳐 보였다. 카우보이가 총을 들었다 놨다 하는 간판이었다.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물드는 창문을 건너다보다가, 그녀는 문득 그녀가 두고 온 여러 삶들이 모두 이 호텔 어딘가에 묵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붉은 곱슬머리 대신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짧게 자른 그녀도, 그 짧은 머리를 샤워타올로 감싸올린 그녀도 여기에 있다. 한편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녀도, 호텔 지하 2층 카지노에서 룰렛을 돌리고 있는 그녀도, 잭팟을 터뜨리고 기뻐하는 그녀도 있으며 갑갑함을 견디지 못하고 빗속으로 나간 그녀도 있다... 그리고 폭우가 쏟아지는 구름보다 한 층 위, 비행기를 타고 고요한 하늘을 날아가고 있는 그녀도...

초인종이 울렸다.

슬리퍼를 끌고 나가 문을 열었다.

"부탁하신 얼음입니다."

룸서비스 카트를 끌고 온 벨보이가 말했다.

"저는 얼음을 시킨 적이 없는데요..."

"819호에서 전화 주셨잖아요?"

벨보이는 지쳐 보였다. 그는 완벽한 벨보이의 얼굴을 가졌다. 완벽한 벨보이라면 으레 그래야 하듯 지쳐 보였다. 줄리아 로버츠는 네, 감사합니다, 하고 얼음을 받았다. 문이 닫히고 방에는 그녀와 쓰일 곳 없는 얼음 한 무더기만 남았다. 어딘가 슬프고 코믹한 기분이 들었다. 슬라이스 오브 라이프.


다음날 아침, 줄리아 로버츠는 로비로 내려갔다. 간밤의 폭우는 그저 꿈이었다는 듯이 사방이 고요했다. 입구에 들이친 빗물을 벨보이가 대걸레로 천천히 닦고 있었다. 레스토랑으로 이동해 뷔페 앞에 섰다. 천천히 접시에 과일을 산더미처럼 담았다. 그리고 한 접시 가득 담은 과일을 하나씩 포크로 집어 꼭꼭 씹었다. 과일의 산미가 입안을 찌르며 천천히 감각들이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두 번 더 접시를 가득 채워 현실이 완벽하게 현실처럼 느껴질 때까지 과일 먹기를 반복했다. 체크아웃을 하고 로비를 나서는데 누군가 그녀와 어깨를 부딪혔다. 순간, 줄리아 로버츠는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해야 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또 다른 자기 자신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시간이 꿈속에서처럼 느리게 흘렀다.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밀듯이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줄리아 로버츠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것은 무장 강도이다. 그는 간밤 동안 영화에서 라디오 방송 속으로, 그리고 이제는 호텔의 로비의 풍경을 담은 엽서 속으로 도망친 참이다. 엽서 속에서 그는 잠복하고 있던 경찰들에게 체포된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무언가에 부딪힌 듯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붉은 곱슬머리 여성이 서 있다. 엽서 째로 체포된 무장 강도는 편지봉투에 넣어져 라스베이거스 경찰국 서장의 책상 앞으로 배달되었다. 사건 보고서를 작성하며 경찰서장은 엽서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런데 저 여성은 정말 완벽한 영화배우의 얼굴을 가졌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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