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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Jun 12. 2020

아파트는 어떻게 불패의 신화를 만드는가

아파트 입주박람회를 보고 느낀 점

5년 넘게 살던 아파트를 정리하고 보관이사 한 달 째... 정처없는 뜨내기 생활을 하고 있자니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집을 내놓고 근 한 달 가까이 마땅히 집을 보러 오는 사람조차 없어서 약간 걱정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1층이라 그런가..."

"부동산 정책 때문에 거래가 절벽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엔 장기전으로 가야겠구나 마음 먹을 찰나에 덜컥 집이 팔렸다. 말 그대로 순식간에 팔렸다. 계약을 하기도 전에 계약금이 입금되는 통에 어떻게 되돌릴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 안팔려서 고민하던 집이 그렇게 덜컥 팔리자 막상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분양받은 아파트의 입주 예정일이 미뤄지면서 집을 비워줘야 하는 날짜와 새로운 집에 입주해야 하는 날짜가 두 달 정도 어긋나 버린 것. 꼼짝없이 두 달 동안 거처없는 나그네 생활을 해야했지만, 걱정도 잠시 뿐 새 아파트에 입주한다는 기대로 넉넉하게 걱정을 묻어두고 피난민 생활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런 기대로 피난민 생활을 하기에 새 아파트에 입주하는 일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입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파트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볼 기회가 생겼다고 해야할까?

@deezeen


1. 아파트의 새로운 권력으로 자리잡은 입주자 인터넷 카페

새 아파트 입주와 관련해서 놀라웠던 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입주자 모임 인터넷 카페였다. 입주하게 될 아파트의 인터넷 카페의 경우 회원 수가 2000명 정도로, 단지 규모가 2500세대임을 감안하면 전체 세대의 약 80프로 정도가 카페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었다. 재개발 지구로 비교적 높은 연령대의 조합원 구성이 많은 걸 감안하면 꽤 높은 수치로 생각됐다.


이렇게 연령과 구성을 떠나 대부분의 세대가 입주자 모임 인터넷 카페로 모이다 보니, 입주자 모임 인터넷 카페는 사실상 입주자들이 아파트에 관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플랫폼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플랫폼의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아파트와 관련된 입주 예정자들의 여론 형성과 전파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실제로 입주자 모임 인터넷 카페에서 층간 소음관련 바닥 자재나 마감 등을 공론화 해서, 결국 시공사에서 해당 사안을 변경하는 등 공식적인 입주자 협회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이 정도로는 인터넷 입주자 카페가 새로운 권력이 되었다고까지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직접 카페에 가입해 지켜 본 바, 인터넷 입주자 카페의 진정한 권력은 아파트에 관한 민원에 있지 않았다. 그것 보다는 인테리어나 가전제품처럼 고가의 아파트 입주 관련 상품을 대량으로 판매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의 구매력에 있다고 판단됐다. 입주가 다가오면서, 실제로 업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카페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인테리어, 청소, 이사 업체부터 주택 담보 대출을 취급하는 은행까지... 인터넷 카페에는 업체 게시판이 별도로 만들어졌다. 물론 해당 게시판에 들어오기 위해서 업체들은 상당 부분의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아파트 입주 안내 홍보 책자에 인터넷 카페 운영진 소개와 인터뷰가 실려 있던 부분이었다. 문득 얼마 전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묘하게 오버랩 됐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권력의 탄생과 작동방식은 명확했다. 그러나 오늘날 모두가 서로 연결되면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권력이 탄생할 수 있게 되었다. 초연결된(hyperconnented) 대중이 만들어내는 뉴파워 즉, '신권력'이 바로 그것이다. - 책 본문 중에서

뭐, 일개 아파트 입주자 카페를 보고 느낀 바로는 좀 거창한 바가 없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의 새로운 권력으로 자리잡고 있는 인터넷 카페의 모습은 꽤 생각해 볼만한 구석이 있어 보였다.


2.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는 어떻게 통과의례가 되고 있나

입주자 인터넷 카페의 파워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 했는데, 아직 하이라이트가 남아 있다. 그건 바로 카페에서 주최하다시피 한 입주 박람회였다. 카페 운영진이 주축이 되어 기획한 입주 박람회는 특급 호텔 컨벤션 센터에서 진행됐다. 박람회에 참여하는 업체들은 까다로운 심사와 높은 수수료를 지불하고 기꺼이 박람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였다.


새 아파트는 처음 입주해보는 순진한 호갱(?)인 나로서는 입주 박람회 자체가 신세계였다. 중문, 탄성코트, 줄눈, 선반, 시스템에어컨, 입주청소, 커튼, 조명 등등 아파트의 입주 박람회에 준비된 상품들은 품목과 규격이 모두 천편일률적이었고, 그 천편일률적인 형식 안에서 업체들의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결혼 할 때 스튜디오, 메이크업, 드레스를 패키지로 묶어서 스드메로 파는 것처럼... 그렇게 아파트 입주 박람회의 상품들은 당연한 통과의례처럼 팔리고 있었다.

이미지 출처 : FEX풀하우스전람

한국 사회에서 통과의례는 굉장히 중요하게 인식될 뿐더러, 그만큼 많은 비용을 아낌없이 쓰는 대상이기도 하다. 생일파티, 졸업식, 결혼식, 장례식처럼... 아파트 입주는 하나의 통과의례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기꺼이 빚을 내서 아파트를 구입하고, 입주 박람회라는 다소 생경한 박람회에 와서 목돈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고수익 부동산 투자의 대상으로 한국의 아파트 선호 현상을 바라보기에는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이 되는 건, 바로 이런 문화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아파트 부동산 정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왜냐하면 아파트는 이미 한국 사회에서 규격화 된 통과의례처럼 자리를 잡아가고, 아니 잡았기 때문이다. 그 통과의례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은 비단 입주민 뿐이 아니다. 아파트 집집마다 판매되고 있는 각종 상품과 서비스, 그 상품과 서비스를 둘러싼 산업의 생태계 역시 아파트를 필요로 한다. 이들 산업 생태계 역시 생존을 위해서는 아파트라는 통과의례가 반드시 필요한 게 현실이다. 그렇게 아파트는 한국 사회에서 불패의 신화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그런 통과의례의 문화와 산업 생태계가 깨지지 않는한 아마도 아파트의 불패는 계속되지 않을까?


어쨌든... 거처 없는 떠돌이 생활에 지쳤던 것인지, 자그마한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서론이 조금 길었던 것 같다. 자, 이제 그만 짐정리를 시작해야겠다.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집사야 제대로 안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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