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작년에 제주도에 갔을 때였다. 청수리 곶자왈에서 반딧불이 축제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해가 질 무렵 가족과 함께 찾아가 보았다.
청수리 곶자왈을 찾아 차를 몰아서 가는데, 좀처럼 목적지를 찾지 못했다. 네비는 자꾸만 경로를 재탐색 하기만 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데, 마음이 조금 급해지기 시작했다.그러다가 좁은 비포장도로로 차를 몰게 됐는데, 한 십분 정도 덜컹거리며 달렸을까, 언뜻 보기에도 꽤 규모가 큰 단층 건물이 나타났다.
그 단층 건물은 외부가 회색 콘크리트로 되어 있었는데, 건물 앞에는 대형버스 몇 대쯤은 넉넉히 들어갈 자갈이 깔린 넓은 주차장이 있었다. 우리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건물 입구로 걸어갔다. 입구는 반투명 유리문으로 되어 있었는데, 문에는 "반딧불이 체험 가능합니다"라고 적힌 A4 용지가 붙어 있었다.
출입문을 열고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자, 머리가 희끗한 노부부가 앉아있는 계산대가 나왔고, 계산대 안쪽으로 상품이 진열된 매대가 보였다. 매대에 진열된 상품들은 대부분 편의점에서 파는 물건들이었고, 일부는 지역특산물 같은 것들이었다.
우리는 생수를 한 병 사면서 노부부에게 반딧불이 체험이 가능한 지 물었다. 노부부는 노트에 적힌 시간표 같은 것을 보고, 우리에게 반딧불이 체험이 가능한 시간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부부에게 시간과 순번이 적힌 종이 쪽지를 건네받았다. 노부부는 우리에게 체험 시간이 되면 종이 쪽지를 가지고 주차장으로 오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지금 기억하기로, 그 때 노부부가 일러 준 반딧불이 체험 시간이 되기 까지는 두어 시간 정도 더 기달려야 했던 것 같다. 우리는 건물과 연결된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가 보았다.
그 건물의 옥상에서 봤던 풍경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건물을 빙 둘러싸고 있는 숲은 온통 녹색이면서도, 녹색의 짙음과 옅음이 각각 제각각이었다. 뭐랄까 마치 스펀지로 세상에 있는 모든 종류의 녹색을 꾹꾹 눌러 찍은 풍경이랄까? 그 풍경을 보며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숲속을 거닐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옥상에서 내려와 건물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숲 가까이로 걸어갔다. 숲으로 가는 입구에는 작은 호수가 있었고, 호수 위를 가로질러 돌로 된 아치형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호수의 표면은 잘게 썬 꽃잎같은 녹색의 여린 이파리들로 덮여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숲은 더 짙은 녹색으로 보였다. 우리는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다리 위로 올라가서 사진을 찍고 건물 근처로 되돌아왔다.
반딧불이 체험은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체험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어디선가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아주 허름한 미니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어딘가 비현실적인 광경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람들은 노부부의 안내를 따라서 미니버스에 탑승했다. 미니버스는 차창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고, 낡은 좌석은 군데군데 찢겨져서 시트 안쪽으로 구멍 뚫린 노란 스펀지가 보일 정도였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약간의 불안감 같은 게 느껴졌지만, 신기하게도 그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미니버스는 숲길을 따라 한참을 달려서야 멈춰섰다. 반딧불이를 체험하는 곳은 건물 옥상에서 봤던 드넓은 숲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버스에서 모두 내리자 노부부는 반딧불이 체험과 관련된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반딧불이가 달아나기 때문에 모기향을 절대 사용하지 말 것"
"불빛을 보면 반딧불이가 달아나기 때문에 절대 손전등이나 휴대폰 사용을 하지 말 것"
노부부의 안내에 따라 사람들은 숲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미 해가 완전히 저문 밤이었지만, 달빛 때문인지 숲길은 희미하게나마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숲길의 실루엣 속에서 퍼져나오는 짙은 녹음의 싱싱한 공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산뜻한 향기가 났다. 사람들은 기지개를 펴며 숲 속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때 갑자기 노부부가 우리 가족이 있는 곳으로 급하게 다가왔다.
"뭐하는 겁니까?"
나는 영문을 모른 채, 노부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노부부는 딸아이의 신발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딸아이의 신발쪽을 향했다. 나 역시 사람들과 함께 딸아이의 신발을 쳐다보았다. 딸아이의 신발 바닥이 색색의 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딸아이의 신발은 걸을 때마다 불빛이 나오는 신발이었다. 평소 눈에 띌 정도로 환하거나 화려하지 않아서 잊고 있었지만, 딸아이의 신발은 분명 걸을 때마다 반짝거리며 불빛을 냈다. 어둠이 내린 숲길 위에서 그 반짝임이 유독 환하게 느껴졌다.
나는 딸아이를 안고서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1학년인 딸아이는 아빠의 품에 안겨서 숲길을 걷는 게 즐거운 듯 자꾸만 내 귀에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숲길을 따라 걸은지 얼마되지 않아, 꽁지에 불빛을 매단 반딧불이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딸아이를 안고 걷느라 팔이 몹시 저렸지만, 짙은 녹음의 공기를 마시며 어둠이 내린 숲 길 위의 반딧불이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딘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숲길은 고요했지만 적막하진 않았다. 사방에서 짙은 연둣빛의 반딧불이 불빛이 제각각 궤적이 다른 원을 그리며 은은하게 빛을 냈다. 마치 숲길을 안내하는 등불처럼, 사람들은 은은히 빛나는 반딧불이의 빛을 따라 걸었다. 이따금씩 귓가에서 딸아이의 숨소리가 들렸고, 그 때마다 나는 안고 있는 딸아이의 자세를 고쳐서 바로 안았다. 팔은 무거웠지만 걸음은 가벼웠다. 어디까지든 이대로 계속 걸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청수리 곶자왈에서 공식적으로 열리는 반딧불이 체험 행사장은 그곳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날 우리가 걸었던 숲길은 세상에 없는 구부러진 시공간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을 다시 찾는다고 해도, 그 날 보았던 건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지, 노부부는 여전히 건강하게 반딧불이 체험을 안내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그날의 산책은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산책이라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