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영웅>은 끝났지만 저 혼자 리프라이즈 할게요
S#1. 우리는 모였다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뜨거운 심장으로
난세에 진짜 영웅이 탄생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을 때에는 알 수 없지만, 큰 위기가 닥쳤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영웅의 존재. 화재 현장에서 수많은 목숨을 구한 사람, 기차 선로에 떨어진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기차를 손으로 미는 사람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순간에 등장한 현실 속의 영웅은 영화 속 아이언맨이나 스파이더맨, 토르처럼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사실은 길거리에서 나를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아주 평범한 시민들이라는 점에서 그 위대함과 감동이 배가 되곤 합니다.
뮤지컬 <영웅> 또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도마 안중근 의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하얼빈 의거의 타임라인을 따라가고 있는데, 극을 보기 전에는 단순한 역사 뮤지컬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평범한 시민이었던 '영웅'들의 인간적인 모습과 심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기억하는 것, 그 이상의 감동을 주는 작품입니다.
S#2. 바람이여 도우소서 우리에게 힘을 주오 기약 돼있는 그 날을 위해
작품의 주인공인 안중근 의사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고 있는, 알아야 할 위인입니다. 역사 교과서에서 한번도 언급이 빠진 적이 없으며, 일제강점기에 하얼빈 의거로 독립운동에 큰 공을 세운 분이기 때문이지요. (뮤지컬 리뷰를 쓰고 있을 뿐이지만, 배역 이름으로라도 그 이름을 쉽게 말하기가 조심스러워 꼬박꼬박 '의사'를 붙이는 이유 또한, 위인에 대한 제 나름의 예의입니다.)
역사 교과서는 사실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역사 속 인물은 개인의 친근함보다는 위인으로서의 위대함이나 그 숭고함이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뮤지컬 <영웅>은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예술작품이고, 그래서 사건이 이뤄지는 동안의 인물의 심리를 스토리로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막이 오르면, 역사 교과서 속 진중하고 올곧은 모습의 안중근 의사가 무대 위에 등장합니다. 동지들과 왼손 넷째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 혈서를 쓰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지만 극이 진행될 수록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드러납니다. 든든하고 믿음직한 독립운동가 동지이자, 때로는 고국에 있는 처자식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이자, 마지막 순간에는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극 중에는 안중근 의사 외에도 굳은 의지와 열정으로 하얼빈 의거에 함께한 수많은 독립운동가 동지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 하얼빈 의거에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가 핵심 인물로 참여하는데, 그들은 갓 쪄낸 따끈따끈한 만두 하나에 웃음 짓고, 그리운 어머니와 고향을 생각하며 눈물 짓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우덕순과 조도선은 거사를 앞두고 긴장되는 마음에 아리랑을 부르기도 하고, 독립군 막내 유동하는 열여섯 소녀 링링을 짝사랑하기도 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을 자주 보여줍니다. 이렇게 순수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독립운동이라는 큰 뜻을 품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이러한 수더분하고 일상적인 장면들은 시대적 배경과 대비되어 극의 몰입감을 더합니다.
뮤지컬 <영웅>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역사 뮤지컬이지만, 풍성한 내용 전개를 위해 추가된 가상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남성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히로인 역할을 하는 설희와 링링입니다.
링링은 안중근 의사의 친구이자, 만두가게를 운영하는 왕웨이의 여동생입니다. 극 중 열여섯살로, 안중근 의사를 짝사랑하는 소녀인데요. 독립군을 돕다가 일본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오빠 왕웨이의 뒤를 이어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생을 마감합니다. 링링을 짝사랑하는 유동하와 함께 전체적으로 다소 무거운 분위기에서 유일하게 풋풋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설희는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어린 궁녀였습니다. 사건 당시의 충격과 트라우마로 고통스러워하던 설희는 황실 내의 비밀 조직 수장인 김 내관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밝히고,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일본에서 게이샤로 위장한 설희는 아름다운 춤사위로 이토 히로부미를 매혹시키고, 이토는 조선을 넘어 만주 지역까지 점령할 목적으로 하얼빈으로 향하는 여정에 설희를 데려가기까지 합니다.
하얼빈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잠든 이토를 암살하려던 설희는 계획에 실패하고, 달리는 열차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는데, 이 마지막 순간에 열차 문에 매달려 부르는 넘버 '내 마음 왜 이럴까'에서 그녀의 연약하고도 굳건한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다시 태어나도 조선의 딸이길 빈다는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비록 뮤지컬에서만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역사 속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렇게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모든 등장인물들은 거사를 앞둔 상황에서도 아주 인간적인 모습을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내비칩니다. 영웅은 태어날 때부터 영웅이었던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의 가장 핵심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S#3. 나라 위해 싸운 이들, 벌할 자 누구인가?
누군가에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뮤지컬 넘버를 말해보세요, 라고 하면 적어도 서너명 정도는 이 넘버를 말할 것입니다. '누가 죄인인가'. 뮤지컬 <영웅>의 대표 넘버이자, 대한민국 창작 뮤지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넘버이기도 합니다.
'누가 죄인인가'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체포된 안중근 의사와, 의거에 함께한 핵심 인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가 재판장에서 주어진 마지막 변론에서 부르는 넘버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 넘버를 통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일본이 대한제국에 저지른 만행들을 세계에 알리고자 합니다.
위에서도 말했듯, 뮤지컬 <영웅>에서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영웅이기 이전에, 평범한 삶을 소망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인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죄인인가'의 첫 시작에서 안중근 의사는 '우선, 제가 이토를 살해한 것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죄드립니다.'고 말합니다. 이토를 살해한 것은 대한제국 의병군 참모중장으로서의 안중근 의사에게는 마땅한 일이었지만, 독실한 천주교 신자 토마스(도마)에게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사죄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중근 의사 역을 맡은 배우의 압도적인 대사량과 대극장 특유의 화려하고 웅장한 연출로 유명한 '누가 죄인인가'. 이 넘버의 진가는 바로 후반부에 있습니다. 초반에는 수많은 일본인들(앙상블)이 재판에 참관하며 안중근 의사의 발언에 수근대다가, 후반에는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의 주장에 동조하며, 나라 잃은 고통 알까? 과연 누가 죄인인가? 벌할 자 누구인가? 를 다함께 외치는 모습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합니다. 각자 일본인 기자, 게이샤, 시민 등으로 분하고 무대에 섰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든 배우가 한국인으로서 이 재판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단순히 대극장의 넘버의 웅장함을 넘어, 가슴이 뜨거워지고 소름돋는 경험을 할 수 있는 넘버이기에, 초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는 넘버라는 생각 또한 듭니다.
S#4. 시간이 흐르면 역사 속에서 사라져 이름도 없겠지만 나 오늘 이 순간 후회 없이 살고 싶어
거사를 앞두고 동지들이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으며 다함께 부르는 넘버, '그날을 기약하며'에는 위와 같은 가사가 나옵니다. 뮤지컬 <영웅>을 관람하고 나서, 개인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곱씹었던 가사이기도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머나먼 타국 땅에서 험난한 시련을 겪고 또 버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빼앗긴 조국과 신음하는 우리의 부모 형제, 그리고 그들의 후손인 오늘날의 우리를 위해서였습니다. 어둠과도 같았던 시간에, 그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질 것을 각오하면서도 오늘 이 순간 후회 없이 살고 싶다는 간절한 꿈 하나로 독립운동에 기꺼이 뛰어든 것입니다. 뮤지컬 <영웅> 속의 영웅들은 남들만큼 겁도 많고, 두려운 것도 많은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용기를 내게 됐는지를 보여줍니다. 나라를 위해 싸운 이들의 이야기를 빌려 진짜 '영웅'이 탄생하는 과정을 담은 명작이지요.
우리는 이제 이 이야기를 오랫동안 되새기며, 그들이 목숨 바쳐 지켜낸 이 땅 위에서 오늘 이 순간을 후회없이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언젠가 세상이 새로운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날이 온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