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포기

by 남은

봄에 목화를 심었다.

씨앗 5개를 심었는데 하나도 싹을 틔우지 않았다.

날씨가 아직 쌀쌀해서 그런 거라 여기고, 초여름에 다시 씨앗 3개를 심었다.

기대 않고 있었는데 며칠 뒤 흙 위로 씨앗 껍질이 드러나더니 푸른 떡잎이 돋아났다.

세 놈 중에 가장 강한 놈이 올라왔구나 하는 사이 나머지 두 씨앗도 하루 걸러 싹을 틔웠다.

아직 수분 가득한 주글주글 떡잎이 제법 귀여웠다.


이름도 붙여주었다.

가장 먼저 나온 놈부터 에렌, 미카사, 아르민.


세 놈 다 하루가 다르게 줄기를 쑥쑥 뽑아내더니, 새로운 잎을 하나씩 돋아내기 시작했다.

화분 하나에 다 키우지 못할 거 같아서, 화분 두 개를 더 사서, 각방을 만들어 주었다.

그때가 첫 번째 위기였다.

쭉쭉 뻗어가던 줄기가 꼬부랑 할머니처럼 휘어져 버렸다.

기운 차리라고 햇살 아래 두었는데, 그게 더 악영향을 미쳐 이제 잎까지 말라갔다.

영양제를 사서 화분에 하나씩 꽂았다.

휜 줄기는 나무젓가락으로 받쳐 세웠다.

화분을 창틀에 올렸다가 내렸다가 매일 반복하며 일조량을 조절해 주었다.

정성이 들어가서 그랬는지 목화들은 조금씩 줄기를 곤두세우고 다시 새로운 잎을 돋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화분을 창틀에 올리려다, 미카사의 떡잎 윗부분 줄기가 잘려나가 버렸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도저히 미카사를 포기할 수 없었다.

계속 물을 주고, 영양제를 주고, 일조량을 조절해 주니, 신기하게도 떡잎과 잘려나간 줄기 사이에 다시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래.

포기하면 안 되는 거였어.


그렇게 이 후로 셋다 잘 자랄 줄만 알았다.

가을이 다가오면서 이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줄기가 더 두꺼워지고 슬슬 꽃도 펴야 하는데, 서서히 성장을 멈추더니, 일주일 전에 피운 잎이 그 크기 그대로 자라지 않았다.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한 날씨 탓이었다.

늦더라도 늦봄에는 심었어야 했는데,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다가 너무 늦게 심은 게 탈이었다.

아무리 영양제를 주고, 따뜻한 온수를 받아 물을 주어도 셋다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가장 아랫잎부터 말라가더니, 점점 줄기의 굵기도 얇아져 갔다.

막내 아르민부터 다시 줄기가 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다시 회생한 미카사도 휘었다.

그래도 마지막, 가장 강한 놈 에렌만은 줄기를 곤두세우고 작게나마 어린잎을 새로 돋아내고 있었다.

그래. 에렌이라도 살려내 보자.

미카사와 아르민도 포기 않고 계속 물을 주고, 영양제를 주었다.

추우니까 창틀에는 못 올려놓고, 방바닥에 비추는 햇빛에 맞춰 화분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저께 밤, 집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고, 이제 자려고 이불을 펴려는데, 뭐가 느낌이 이상했다.

에렌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흙에 가까운 줄기까지 바짝 말라버린 미카사와 아르민은 보이는데, 에렌이 보이지 않았다.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놓아두었던 에렌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햇빛이 잘 들었던 곳에 야구잠바가 놓여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야구 잠바를 들어 올렸다.

하.


소주 사 오고 나서 무심코 던져 놓은 야구 잠바 밑에 에렌이 있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곧게 서있던 에렌의 줄기는 야구잠바가 누르는 무게를 유연하게 견디지 못하고 툭하고 동강 나 있었다.

하.


에렌, 미카사, 아르민을 나란히 세웠다.

그리고 하나씩 줄기를 잡고 뿌리를 뽑았다.


포기했다.

그래.

포기란 이럴 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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