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신앙심이 가장 깊었을 때가 훈련소에 있었을 때다.
일요일, 종교활동 때 부르던 찬양에 눈물을 흘릴 뻔했다.
초코파이를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진짜 신의 은총에 놀라서였다.
총을 쏘고도 내 몸이 온전함에, 화생방 훈련 중에도 인내한 용기에, 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육체와 정신의 고통 속에서 신은 분명 큰 힘이 되었다.
비록 그 힘을 대변한 기록물의 영향력 차이는 있을 줄 모르나.
종교활동 속 내가 느낀 은혜로움과, 한 노인의 마음 속 한편 자리 잡은 유대인에 대한 구원의 의지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 여긴다.
유대인들이 설파한 신의 은총에 차등은 없으니.
모세가 홍해를 건너 만끽한 놀라운 은사가, 훈련소를 무사히 마친 나의 안도와 다르지 않으리.
전쟁과 가난 속에 자비를 베푸신 석가의 마음가짐이 훈련소를 견뎌낸 나의 인내와 다르지 않으리.
힘의 논리 안에서 인의를 앞세운 공자의 행실이 급식당번인 내부반 동료들의 완전군장을 가슴팍에 맨 나의 의리와 다르지 않으리.
그들은 힘든 중에 신을 앞세웠고, 사상을 바로 세웠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안락함이 느껴질 때 또한 신과 사상은 두각을 나타낸다.
마치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술 앞에서 군대 시절 이야기를 휘황찬란하게 꺼내듯이 가난과 고초 속에 피어난 종교와 사상은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의 의해 세기를 거쳐가는 예술로 승화된다.
희대의 망언이라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오늘 고생하면 내일이 편하다는 그런 내용이겠지.
망언이라 한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길 바란다.
내 몸을 기준 삼지 않더라도 지금 나의 정신 속 고난이 언젠가 세기를 이어가는 예술로 승화되기를.
비록 종교개혁하면 루터를 떠올리는 현대인들의 머릿속에 그 전 무수히 화형을 당해 육체적 고통을 느끼며 신을 증오해야 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한편 내가 루터가 되지 못하리라는 보장도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