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물의 비린맛은 취향이다.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비린맛이 없으면 또 무슨 맛으로 해산물을 먹을까.
난 그 비린맛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다.
해산물이면 회이든, 구이든, 찜이든 다 좋아한다.
그렇다고 해산물이면 무조건 다 맛있게 먹는 건 아니다.
신선도나 조리법에 따른 격의 차이는 어느 정도 구별할 줄 안다.
낙지로 예를 들어보자.
산낙지.
소금장에 찍어 먹으면 그 쫄깃함과 신선함, 바다의 단백질과 깻기름의 지방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담백함은 저절로 다음 소주잔으로 손이 가게 한다.
그리고 끓는 물에 산 채로 집어넣어, 꿈틀거리는 낙지의 마지막 몸부림을 침 꿀꺽 삼키며 기다리다 먹는 연포탕은, 바다가 선사할 수 있는 극강의 부드러움과 입안 고소하게 감싸 도는 짭짤함을 느끼게 해준다.
낙지는 정말 맛있는 생물이다.
그런데 이런 낙지가 죽은 채로 나왔을 때는 조금 달라진다.
닭갈비 집 메뉴 중 하나인 낙지닭갈비 속 낙지는 죽은 채 구워진다.
갯벌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역동적인 몸놀림을 잃어버린 낙지는 해산물 특유의 비린맛이 다른 감각보다 앞서있다.
비린 맛을 좋아하는 나도 손사래를 치며 맛없다 여긴다.
취향에 맞는 비린 맛도, 정도의 차이가 있고, 그 차이의 이유가 재료 자체의 부패에 있다면 싫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해산물을 좋아한다지만 입맛은 내가 어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신경 체계가 아니다.
낙지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지만 요즘 안철수가 죽은 채 식탁에 올라오는 낙지와 같다.
한때 살아있는 안철수는 존재했다.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자리를 양보할 때, 안철수는 분명 살아 있었다.
눈빛이 총명했었다.
그 시절 살아있던 안철수는 나의 취향을 저격했다.
문재인과 단일후보를 이루고, 선거 사무소의 플래카드가 거두어 지자, 지지자들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안철수의 이름을 외칠 때, 나도 같이 무척 아쉬워했다.
새정치를 해보겠다며 유명 인사들을 주위에 모으고, 한편 김한길의 꼬드김에 넘어가 민주당과 같이하며, 아수라탕 정치판에서 꿈틀거리며 몸부림칠 때도, 나는 침 꿀꺽 삼키며 정치인 안철수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언젠가 안철수의 눈빛은 죽어버렸다.
막연하게 좋아했기 때문에 취향을 저격한 것이라 여겼던 특유의 비린 맛이 그의 장점이었던 혁신, 노력, 끈기, 배려를 앞서가기 시작했다.
물론 죽은 낙지도 다양한 향신료에 노련한 조리법으로 요리해 나가면 손사래 치지 않을 정도의 결과물로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안철수는 그만한 다양한 향신료도 노련한 조리법도 가지고 있지 않은 거 같다.
그냥 맛이 없다.
그저 다시는 사 먹지 않을 메뉴에 불과하게 된 것 같다.
아무튼 다시는 낙지닭갈비를 먹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