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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라푼젤 Aug 07. 2022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

김영하 <작별인사> 서평

(*) 스포주의


또 다른 건 없어? ... 네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믿는 증거 같은 거 말이야.


누군가 내게 당신이 인간이라는 증거를 제시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매 순간 느끼는 이 모든 풍부한 감정들을 기계도 느낄 수 있다면, 매일 밤 꿈을 꾸고, 살결에 닿는 바람을 느끼고, 음악에 마음이 일렁이는 그런 의식이 기계에도 부여될 수 있다면, 나를 기계와 구분 지어주는 '인간다움'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아니, 애초에 '인간다움'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인간 본성의 잔인한 면을 부각한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혹은 냉혹한 현실 속에 이기심으로 점철된 세상을 목도해야 할 때 큰 고통을 느낀다. 재난 영화나 좀비 영화 따위에서 인간들의 집단적 광기가 드러나는 장면이 나올 때면 체한 듯 가슴이 답답해지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조롱하거나 약자를 사정없이 짓밟는 댓글들을 볼 때면 '인간'에 대한 실망으로 괴로워져 잠을 설치기도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어디까지 내몰 수 있는지를 참신한 스토리로 풀어내 많은 호평을 받은 넷플릭스의 인기 시리즈 <블랙 미러>의 1편 <공주와 돼지>를 시청했을 때에는 혐오스러운 인간 군상의 모습에 속이 메슥거려 헛구역질이 나오기까지 했다. 이후에도 나는 며칠 동안 그 드라마를 추천한 남편에게 눈물을 흘리며 원망의 소리를 내뱉었다.


'인간답다'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사람이) 됨됨이나 하는 행동이 도리에 어긋남이 없음'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인간적'이라거나 '인간성'이라거나 하는 표현들만 보아도 사람들은 윤리적인 인간을 진정 '인간다운' 인간이라 여기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 인간다움을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해 온 역사가 곧 인류가 걸어온 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재난영화나 <블랙미러> 속의 '인간답지 못한' 모습이 오히려 기계와 구별되는 인간만의 특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성악설과 성선설 중 무엇이 더 옳은 지를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불완전함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끊임없이 실수하고, 다치고, 끔찍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불완전함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 '네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믿는 증거가 무어냐'라고 내게 묻는다면, '내가 기계라면 이런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라고 대답할 것 같다. 내가 기계라면 비행기 화장실에 아끼는 반지를 놓고 내리지도, 호텔을 더블 부킹 하고선 취소 기한을 넘겨버리지도, 남편에게 혹은 엄마에게, 사랑하는 이들에게 형편없는 말을 해 상처를 줄 일도 없지 않을까. 이런 멍청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후회들이 바로 내가 인간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다.


물론 프로그래밍으로 기계도 이러한 불완전함을 흉내 낼 수는 있겠지만, 실수마저도 정교하게 계산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완벽한 기계일수록 완벽한 프로그래밍대로 움직일 것이다. 기계의 실수는 인간의 실수일 뿐이고, 기계의 자가학습을 통한 발전도 인간의 의도한 프로그래밍의 일부일 뿐이다. 책에서도 언급했 듯 기계는, 고장은 날 지언정 결코 실수하는 법은 없다.


인간이 기계에게 의식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우주를 지배하는 의식이 태초에 인간에게 깃들었듯이 이제 기계도 인간과 같은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프로그래밍으로 기계에게 '의식'을 부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나는 그것이 결코 불가능하다 여기기에, 이 소설이 마치 디즈니 만화영화처럼 판타지로 느껴졌다. 만약 정말 그것이 가능하다면, 기계가 인간의 프로그래밍을 뛰어넘어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스스로 생각해낼 수 있는 '자아'가 있다면, '감정'을 가지고 모든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다면, 인간과 기계를 구별하는 것이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식과 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계가 아니다. 인간과는 다른, 혹은 더 진화한 종의 탄생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즐기던 것들에 흥미를 잃어갔다.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필멸하는 인간들을 위한 송가였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인간다움'의 정의와 함께, '유한한 삶'의 가치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철학적 주제다. 책당모의의 2번째 책이었던 <숨결이 바람 될 때>의 서평에서도 이미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내 인생 최고의 드라마인 <굿 플레이스>의 이야기를 다시금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드라마 속 대사들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김영하 작가님이 <굿 플레이스>를 보고 너무 감명받아 이 소설을 쓰신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이 책을 재밌게 읽었다면 <굿 플레이스>를 꼭 추천하고 싶다. 제발 봐주세요... 


<굿 플레이스>의 주인공들이 온갖 고난을 겪은 후 드디어 당도하게 된 천국에는 그 어떤 부족함도, '실수'도 '후회'도 '죽음'도 없었다. 하지만 그곳은 진짜 천국이 아니었다. 현생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 늘 발버둥 치던 인간들이 막상 '끝없이 무한한' 삶의 반복 앞에서 생기를 잃고 시들어갔다. 결국 주인공들은 '소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천국의 시스템을 바꾸었고, '철이'가 그러했듯, 천국에서의 삶을 충분히 살아낸 후 스스로 하나 둘 소멸을 선택했다. 인간에 가장 가까운 기계였던 철이는 의식을 백업하지 않은 채 인간과 같은 몸으로 선이 앞에 섰고, 결국 인간처럼 소멸했다. 달마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그 미친 짓은 철이가 얼마나 '인간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였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선택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오래, 100년 보다는 200년을, 200년보다는 500년을 살고 싶다. 막상 500년을 살아낸다면 다시금 1,000년을 더 살게 해달라고 조르지 않을까? 아름다운 끝이 있기는 할까? 얼마나 살아야 이제는 충분하다- 여길 수 있을까. 과연 나는 철이처럼, 혹은 <굿 플레이스>의 주인공들처럼 언젠가 '소멸'을 선택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지금 내가 이렇게 '끝'을 두려워하는 것도 내가 '인간'이라는 또 다른 증거겠지만.


이 우주의 어딘가에서 의식이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은 너무나 드물고 귀한 일이고, 그 의식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는 것도 극히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동안 존재는 살아 있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굿 플레이스>의 주인공 중 하나인 치티가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소멸'을 택하기 전 이런 대사를 남긴다. '파도가 해안에 부딪히고 파도는 사라져. 하지만 바다의 물은 여전히 있잖아. 파도는 물이 다르게 존재하는 방식이었을 뿐인 거야.' 광활한 이 우주에서 마치 먼지처럼 잠시 태어났다 스러지는 우리는, 넓은 바다에서 아주 잠시 반짝이는 파도로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파도가 바다로 돌아가 듯, 우리는 언젠가 우주로 혹은 흙으로 어쩌면 영원회귀 속 다른 바퀴로, 또 어쩌면 신이 정하는 곳으로, 각자가 믿는 무엇인가 혹은 어딘가로 돌아갈 것이다.


그 끝이 무엇이건 간에, 어찌 됐건 지금 이 순간, 의식이 있는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어서, 이 책을 읽고 이런 글을 쓰고, 생각하고 아파하고, 또 괴로워하고, 위로받고 안도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의식이 있고, 감정이 있고, 나의 오감으로 이 세상 아름다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고,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 잠들 수 있다면, 행여 내 육신이 피와 체지방으로 이루어진 인간이 아니라 기계란들 어떠할까. 결국 존재하는 형태나 방식은 크게 중요치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제보다 더 나아지려고 하는가', '어제보다 오늘 더 인간다워지고자 노력했는가', '이 짧은 찰나에 가치있는 흔적을 남기고자 했는가'일뿐이다. 


아름다운 끝을 만드는 것, 사랑하는 서로를 아름답게 보내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인간으로서, 혹은 의식이 있는 무언가로서 '생(生)'을 부여받은 것에 따른 마땅한 책임과 의무일 것이다.


2022년 8월 8일, 여섯 번째 책당모의♥




<발제문> by SJY

1. 작가는 철이, 선이, 민이, 박사, 달마 등 여러 인물을 통해 독자에게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을 던져요.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대화 내용(또는 구절)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그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기계와 인간을 구분 짓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2. 선이는 마음에 대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마음이라. 마음이 뭘 말하는지를 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마음은 기억일까요, 어떤 데이터 뭉치일까요? 또는 외부 자극에 대응하는 감정의 집합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뇌나 그것을 닮은 연산 장치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어지러운 현상일까요?"
(목차: 달마 중)

여러분이 정의하는 '마음'이란 무엇인가요?


3. 철이는 미등록 휴머노이드라는 사실이 발견되어 갑작스럽게 수용소에 끌려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혼란에 빠지게 되고, 여러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데요. 고통스럽고 괴로운 상황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곳에서도 분명 기억될 만한, 빛나는 순간들은 있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철이처럼, 여러분의 인생에서도 그런 경험이 있을까요? 당시에는 너무나 힘들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발견한 빛나는 순간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주세요.


4. 최박사(철이 아빠)와 김박사의 대화에서 김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인간은 기계와 결합하고 있어. 지금 웨어러블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여기 아무도 없잖아? 우리의 심장박동, 혈압, 혈당, 그 밖의 모든 수치가 기계에 기록되고 관리되고 있어. 우리가 기계와 다를게 뭐야? 이미 우리는 사이보그라고"

김박사의 말처럼 현대사회는 기계(기술)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넓은 범위에서 과학, 의료 기술 등으로 확장한다면 기술의 발전으로 혜택을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기계로부터 어디까지 도움을 받아야 할까요? 기계가 더욱 발전해야 한다고 보는지, 경계의 대상으로 보는지 논의해보아요.

5. 죽음이 다가오는 시점이라고 가정해 볼게요. 기술이 발전하여 나의 영혼을 휴머노이드에 주입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어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인간의 삶을 그대로 마감할 것인지, 아니면 영속적인 삶을 살 수 있는 휴머노이드가 될 것인지?


6. 원하는 휴머노이드를 만들 수 있다고 해볼게요. 당신을 위한 휴머노이드를 만드실 건가요? 아니라면 그 이유를, 만들고자 한다면 어떤 휴머노이드를 원하는지요?


7. 선이는 생의 의미를 누구보다 각별하게 생각하는 캐릭터예요. '개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니 너무나 짧은 이 찰나의 생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하고, 우주의 원리를 더 깊이 깨우치려 애써야 한다.'라고. 인생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여러분의 인생관을 들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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