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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라푼젤 Sep 13. 2022

누군가에겐 일상, 누군가에겐 이상

윤고은 <밤의 여행자들> 서평


지난 독서모임이 있던 날, 서울에는 전례 없이 많은 비가 내렸다. 수십 개의 카톡방에서 저녁 내내 그리고 늦은 밤까지 온갖 사진이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물에 잠긴 강남역, 허우적대며 걷는 사람들, 하수구에서 역류한 바퀴벌레 떼, 침수된 제네시스 차량 위에서 유유자적 핸드폰을 확인 중인 남자까지... 분명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인데, 아늑한 침대에 누워 사진을 확인하고 있는 내겐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사진들이었다. 익숙한 장소들의 낯선 모습과 기상천외한 드립에 웃고 떠들기도 했다. 사진을 퍼다 나르며 '심각하다. 걱정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다지 무거운 진심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반지하에 사는 일가족 3명이 참변을 당하고, 맨홀에서 실종된 남매가 시체로 발견되는 등 무려 13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되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주택과 상가 2,579채가 침수되고, 441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그날 밤의 폭우는 누군가에게는 가볍게 소비될 가십거리였지만, 다른 어떤 이에게는 생과 사를 가르는 '재난' 그 자체였던 것이다.


재난 여행을 떠남으로써 사람들이 느끼는 반응은 크게 '충격 → 동정과 연민 혹은 불편함 → 내 삶에 대한 감사 → 책임감과 교훈 혹은 나는 살아남았다는 우월감'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어느 단계까지 마음이 움직이느냐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결국 이 모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재난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나는 지금 살아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러니까 재난 가까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전했다, 는 이기적인 위안 말이다.

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재난 앞에 잔인하리만치 둔감하고, 때때로 타인의 재난을 전시하며 안도한다. 그것이 이 책에 등장하는 여행사 '정글'이 존재하는 이유다. '정글'은 끔찍한 재난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그것을 상품화하는 회사이고, 이 책의 주인공은 그러한 정글에서 10년 간 여행 프로그래머로서 일해온 여자다. 정글을 통해 비용을 지불한 관광객들은 초토화된, 혹은 현재 진행 중인 재난의 현장을 둘러보며 각자 나름대로의 의미와 교훈을 찾는다.


실제 우리 현실에 '재난 관광'이라는 상품은 없지만, 이 책의 배경이 된 무이의 모습은 어딘가 많이 익숙하다. 지나친 개발로 인해 무너져 내린 하층민의 삶,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인해 오염된 평범한 일상은 세계 유명 관광도시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목격되는 일이다. 관광사업 개발로 인해 이익을 보는 거대 자본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주민들은 넘쳐나는 관광객들로 인해 삶의 터전을 위협받거나, 폭등하는 집값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집'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여수 벽화마을 주민들 “우리는 개발도, 관광객도 반갑지 않다” < 사회 < 뉴스 < 기사 본문 - 뉴스탑 전남 (dbltv.com)


여행을 사랑하는 내 또래의 청춘들은 아마도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꽤나 불편한 감정을 자주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나 역시 회계법인에 다니던 시절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는 탈출구로서 여행을 사랑했고, 또 여행에 집착하기도 했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여행을 하는 도중 때때로 누군가의 삶에 해를 끼친 가해자였거나 방관자였을 지도 모른다. 이 책 말미에 쓰인 해설 속 표현 그대로, '낭만'이 완전히 삭제되어버린 여행의 묘사는 내겐 너무도 서늘하고 시큰했다.


초리를 깔아뭉갠 짐은 압력밥솥과 불판, 프로판가스 등이었는데, 사막 한복판에서 삼계탕과 삼겹살을 해 먹으려던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초리는 기어코 쓰러졌고, 가이드는 매끄럽지 못한 일정에 대해 사과했다. 관광객들이 떠난 후 초리는 결국 죽었다.


이 대목에서 나의 불편함은 정점을 찍었다. 과거 남미 여행 중 오지 중의 오지인 '우유니 사막' 한가운데에서 브런치를 즐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이와 국적이 각기 다른 사람들과 함께한 투어였는데, 하나같이 식사를 끝낸 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누군가는 이 벅찬 감동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나 역시 우유니에서 나흘을 머물며 매일 쏟아져내리는 은하수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노을을 수없이 마주했지만, 사막에서 여유롭게 브런치를 즐기던 그 순간이 최고였노라고 말하곤 했다. 물론 삼계탕이나 삼겹살이 아닌 간단한 샌드위치와 소시지 따위였고, 그 짐들은 초리가 아닌 사륜구동 지프차가 짊어지고 왔지만. 어쩐지 이 대목을 읽고 나니 내가 오래도록 간직했던 낭만에 파사삭 금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막 한가운데서의 브런치를 준비하던 현지인 가이드의 분주한 손놀림, 그리고 우리가 식사를 하고 풍경을 감상하는 동안 지프차 한 편에서 멍하니 앉아있던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여행 내내 자주 눈에 뜨였지만 애써 외면하고자 했던 그 모습이 엉거주춤 기억 속에서 기어 나왔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풍경 뒤로 겹쳐진 가이드의 시큰둥한 표정이 불편했다.


아프리카 여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프리카 여행의 첫 도시였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은 아프리카 내에서도 아파르헤이트의 잔재로 인한 유색인종 차별과 흑백 빈부격차가 심하기로 유명한 도시였다. 우리가 가는 고급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백인이었고, 종업원은 100% 흑인이었다. 케이프타운에서의 일정은 내내 휘황찬란했다. 와이너리를 방문하기 위해 들른 근교는 동화 속처럼 아름다웠고, 길거리는 상해의 신천지를 떠올리게 했다. 커다란 쇼핑몰을 끼고 있었던 호텔 역시 럭셔리 그 자체였다. 케이프타운 내 최고의 부촌인 캠스베이는 샌프란시스코와 소살리토를 떠올리게 했고, 나는 준비해온 옷 중 가장 예쁜 옷을 챙겨 입고 수십 장의 사진을 남겼다.

남아공은 1990년대 중반까지도 백인우월주의에 근거한 인종차별정책(a.k.a 아파르트헤이트)이 법률로 규정되어 있던 나라다. 백인과 유색 인종 사이에는 법률로 보호된 지배관계가 있었고, 유색 인종은 백인과의 결혼 금지, 직업의 제한, 승차 분리, 공공시설 사용 제한 등의 차별 대우를 받았다. 1994년 만델라 대통령의 당선 이후 아파르헤이트는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흑백 빈부격차가 극심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근교로 나가기 위해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내가 발을 디뎠던 곳들과는 너무 다른 풍경들이 차창 밖으로 펼쳐졌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양철 지붕이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이것을 집이라고 불러도 되나 싶을 정도의 것들이 주욱 늘어선 빈민촌이 멀건 민낯을 드러냈다. 그리고 먼지가 풀풀 날리는 그 흙길을 따라 수많은 현지인들이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도심 주변은 밀려드는 관광객들을 위해 끝없이 세를 확장하며 개발 중이었기에 빈민촌은 점점 더 멀찍이 외곽으로 밀려났다. 그로 인해 도심에서 일을 하는 흑인들은 빈민가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매일 왕복 2-3시간 이상, 많게는 4-5시간까지도 걷는 일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그들 중 누군가는 그럼에도 일자리를 얻어 굶지 않음에 감사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케이프타운의 발전을 재난이라 여길 것이다.


글을 쓰다 보니 더욱 불편해졌다. 불편한데 뭐가 불편한지는 잘 모르겠고, 어딘가 찝찝한 이 기분.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감정도 딱 그랬다. 내가 해왔던 여행이 이토록 잔인한 여행이었나. 집으로 돌아가는 흑인들의 발걸음과 낡아빠진 신발을 카메라에 담던 내 모습이 요나와 겹쳐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가 다시 또 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반쪽짜리 낭만을 찾아 헤맬 것이라는 것을. 때론 그것이 타인의 재난을 관람하는 것일 수도 있고, 타인에게 재난을 일으키는 행위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유니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3-4번의 비행기 환승을 거쳐 그곳으로 밀려든다. (참고로 한국에서 우유니에 가려면 최단거리로 가도 최소 5개의 비행기를 타야 한다.) 누군가에겐 평생 잊지 못할 풍경이지만, 돈을 벌기 위해 그 광경을 매일 봐야 하는 가이드들에겐 그저 지겨운 일터일 뿐이다. 날로 까다로워지는 관광객들의 요구와 그로 인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이 그들에겐 재난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가이드에게도 유독 하늘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날이 있지 않을까. 고개를 들었을 때 문득 어제와는 많이 달라 보이는 노을에 가슴이 아릿해오는 그런 날.


여행에 돌아온 후 항상 sns에 남기는 짤막한 소회에 빼먹지 않고 덧붙이는 말이 있다. 내 일상이 아니기에 감동받을 수 있는 것들에 감사하며, 내 삶을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들이 아름답다 느끼고 감동받을 수 있도록 나의 일상을 더욱 아름답게 가꿀 것이라는 다짐. 지금 누군가는 내 삶을 스쳐가며 여행하고 있고, 나의 일상은 나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들에게 배경화면이 되어주고 있을 것이다. 힘 빠진 채 멍하니 걷는 내 모습이 누군가의 카메라 프레임에 담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의 여행 기록에서 조금 더 멋진 엑스트라가 되어주고 싶다.



재난은 피할 수 없다. 우연히 찾아온 재난을 극복해내는 것은 결국 온전히 남겨진 이들의 몫이다.


2022년 9월 14일, 일곱 번째 책당모의♥



[발제문] by LYK

1. 작가 윤고은은 평범한 단어로 써 내려갈 수도 있었던 문장에 기가 막힌 표현들로 문장의 생명력을 더했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좋은 문장들 중에서 가장 감명 깊게 마음에 새겨진 문장을 이야기해 봅시다.  

ex) 
P.10 거기엔 버려진 생활들이 있었다.
특히 플라스틱들, 썩지 않는 것들, 그러나 잊히기 쉬운 것들, 수명이 길지만 기억 속에서는 짧은 것들.

P.54 컵에 담긴 얼음 위로 커피 방울이 똑똑 노크하듯 떨어졌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동안 시간도 똑똑 점을 찍듯 멈춰 섰다.


2. 이 소설의 초입에는 요나가 회사 '정글'에서 겪는 불합리한 상황이 상세하게 서술됩니다. 여기 모인 멤버들 모두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불합리한 상황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것들을 했는지 이야기해봅시다.


3. 요나는 숙취로 열차 다른 칸의 화장실을 찾게 되면서 일행들과 떨어지게 됩니다. 이후에 소설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땅에서 요나가 리조트를 찾아가는 상황을 상세하게 서술합니다. 만약 우리가 요나와 같이 타지에서 일행과 떨어져 버린 상황이 생겼다면 어떤 경로로 한국을 찾아 나설 것인지 이야기해봅시다.


4. 황준모 씨(작가)가 사막에 싱크홀을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요나는 미래에 다가올 '8월의 첫 번째 일요일'에 다치게 될 100명의 사상자들과 희생자들을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정글과 새 프로그램 이야기, 담당자는 요나를 통해서만 거래를 할 것이라는 등 요나에게 유리하게 적용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내 기회라고 생각하고 위스키 한 모금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아닌 일인 것을 알지만, 도덕적 해이에 빠져보았던 경험이 있거나, 고민했던 경험이 있다면 이야기해봅시다. 


5. 이 책은 윤고은 작가의 상상 속 여행지 '무이'라는 곳을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각자 기억에 남는 여행지를 떠올려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서로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여행지 혹은 개인적으로 좋았던 여행지가 있다면 이야기해봅시다.


6. 작가가 그린 '무이'라는 곳이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베트남의 판티엣 부근의 무이네 사막을 많이 참고했다고 느껴졌습니다. 사막의 풍경과 해변가의 수상가옥들 그리고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맹그로브 숲까지 인상 깊은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각자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들을 꼽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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