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함이 세상을 구한다.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서평

by 책 읽는 라푼젤

(*) 스포주의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재밌게 읽은 책.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내용과 참신한 전개에 감탄하며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 이토록 따뜻한 제목에 알록달록 예쁜 표지까지 입은 책이 디스토피아 소설이라니...?!


게다가 이 책을 읽던 중 현실에서 너무도 안타깝고 끔찍한 참사가 발생했던 터라 이 책의 의미가 다르게 읽히고 또 내게 남다르게 남았다. 연일 쏟아지는 안타까운 기사와 사연들, 책임을 전가하는 어른들, 피해자와 유가족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로 인해 마음이 번잡하고 괴로웠는데, 이 책이 많은 위로를 주었다. 멸망하기 일보 직전의 형편없는 지구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고 오히려 인류애가 충전되는 기이한 경험을 한 것이다.


우리가 이미 깊이 개입해버린, 되돌릴 수 없는,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곳 지구를 생각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 작가의 말


이 책은 인간과 인간 사이사이에 피어나는 사랑에 대한 책이다. 남녀 간의 원초적 사랑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아름다운 감정을 통칭하는 표현으로서의 사랑. 세상이 망해도, 결국 '축복받은 땅' 프림빌리지엔 사랑이 남았다. 이 책에서 '사랑한다'는 표현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 어떤 로맨스 소설보다 아름답고 뭉클했다. 가장 위대한 사랑의 표현은 잊지 않는 것, 그리고 서로를 위한 약속을 지켜내는 것일 테니까.


타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던 사람들만이 돔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인류에게는 불행하게도, 오직 그런 이들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았지.


정말, 이기적인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일까? 나이가 들수록 성악설을 더 믿게 되고, 권선징악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간 사람들이 모든 것을 독식해버리고, 남에게 상처 준 사람들이 오히려 두 발 뻗고 편히 잠드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버리지 못한 희망, '선함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선함이 결국 세상을 구할 것이라는 것을 작가는 너무도 우아하게, 세련되게 표현해냈다. 돔에서 밀려 나와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면서도 아마라와 나오미에게 끝내 총을 쏘지 못한 그 여자의 연약한 마음이, 어찌 보면 바보 같은 그 여리고 따뜻한 마음이. 결국 세상을 구해낼 것이다.


반복되고 있었다. 나오미의 삶 속에서 계속. 떠나고, 어딘가에 마음을 두고, 또다시 쫓겨나듯 도망치는 밤들이.


끝없이 반복된 상처로 인하여 그 어느 곳에도 정을 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지수. 프림 빌리지도 언젠간 끝나게 될 세계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사실 누구보다 그곳을 지켜내고 싶었던 지수. 나오미도, 아마라도, 하루도, 지수도 결국 프림 빌리지를 지켜내지 못한 채 다시금 세계 밖으로 밀려났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어떤 세계에 떠밀려와 고운 마음을 가득 쏟아붓고 정성스레 그 마음을 길러내도 결국 언젠가 그 세계는 끝이 나 버린다. 거창하게 세상이 망하지 않더라도, 학교를 떠날 때, 직장을 옮길 때,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인생의 크고 작은 변화를 맞이할 때마다 우리의 세계는 깨어지고, 때로는 내쳐지고, 때로는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부유한다.


내게도 어딘 가에 마음을 두고, 또다시 쫓겨나듯 밀려나고 도망쳤던 무수히 많은 밤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마라와 나오미, 그리고 프림 빌리지의 그녀들이 양손 가득 모스바나를 들고 떠났던 것처럼, 우리는 정성스레 쌓아 올렸던 한 세계에서 떠밀려 날 때 마음속에 모스바나 한 자루는 품어내지 않았을까. 모스바나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우리가 그 세계에서 또 치열하게 성장해냈다는 증표이자 우리가 받았던 사랑의 수확물이니.


프림을 떠난 이후 우리는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프림에서 하던 일을 반복하고 있었죠. 어떤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시절이 그리웠고, 그것만이 우리를 잠시나마 과거로 되돌려 보내 주었으니까요.


세계가 채 끝나기 전 대니처럼 도망가 버리는 사람도 있고, 하루처럼 울며불며 매달리다 다른 사람 손에 이끌려 떠나가는 사람들도 있고, 지수처럼 마지막까지 그곳에 남아 폐허가 된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마지막 모습은 다 다를지언정, 결국은 한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에 정착하고, 또 새로운 세계를 가꾸어나갈 것이다. 한 세계에서 배워냈던 삶을 반복한 그녀들. 그리고 그녀들의 작은 노력과 사랑이 결국 세상을 구해냈다. 그녀들처럼 거창하게 이 지구를 구해내진 못할지라도, 당신의 온기 가득한 손길과 따뜻한 눈길이 적어도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웃을 구해낼 수는 있다. 나는 그녀들이 보여준 따뜻한 마음에 진정으로 위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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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은 후에야 이 책이 '에코페미니즘'이라는 장르의 책이라는 것을 알았다. '에코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들어보긴 했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몰랐는데, 아 이런 거였구나. 또 하나 배웠다.


남자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 것이 책을 읽는 내내 사실 많이 어색하긴 했다. 페메니스트들이 바라는 것이 여자만 존재하는 세상은 아닐 텐데. 사회의 큰 줄기에서 늘 여성이 배제되었던 것에 대한 일종의 반항 혹은 미러링인가? 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준다는 미러링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의도한 바가 있긴 하겠지만, 어떤 한 성을 배제하는 것이 폭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솔직히 이 책의 주인공들이 여자여서, 여자들이 세상을 구해내서 좋았다. 내가 페미니스트는 못될지라도 '여자'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건가. 약하고 작은 내게 세상을 구해낼 힘은 많이 부족한 것 같은데, 마블 영화의 주인공은 될지 못할지라도, 나의 따뜻함과 사랑이 세상을 조금 더 나아지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자신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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