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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라푼젤 Dec 15. 2022

비로소 마주한 아버지의 진짜 얼굴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서평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오죽하면.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이 문장을 읽는데 숨이 턱 막힌 듯 답답했다. 내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아버지는 글쓴이의 아버지처럼 깊은 신념을 지닌 대단한 혁명가는 아니었다. 아니, 대단한 혁명가라면 또 몰라, 신념 때문이라면 또 몰라, 그것도 아니면서. 그저 그런 평범한 소시민인 주제에 나의 아버지는 지나치게 오지랖이 넓고, 지나치게 또 착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착하다'라는 단어는 마치 '무능하다' 혹은 '바보 같다'의 동의어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운전할 때 아무리 답답한 상황에도 행여 누군가 놀랄까 쉽사리 경적조차 울리지 못하는 성격이다. 옆자리에 앉은 이가 시간 내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외면한 채 말이다. 내 결혼식 때 몇 날 며칠 애써 준비한 축사를 단 한 문장도 읽지 못하고(사랑하는 우리 ㄸ.. 까지만 겨우 읽어냈다.),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단상 아래로 내려설 만큼 여리고 눈물도 많다. 그러니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는 친척들의 빚보증 부탁이라거나 엉뚱한 투자 제안을 쉽사리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 그다지 이상하지도 않다.


남들에게 착한 사람이면 뭐하나, 어린 마음에 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눈물에는 그렇게도 전전긍긍이면서, 어찌하여 가족이 흘리게 될 피눈물과 자식들이 포기해야 할 기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겉에서 보기엔 늘 엄마가 악역을 자처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딸들에게 엄마는 어린 시절 내내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와 근 30년을 살다 보니 나는 '착하다'라는 단어에 알레르기가 생겼다.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이 아버지와 너무 닮았더라. 미국 유학 중 한국으로 들어오는 비행 편이 비즈니스 석으로 업그레이드가 되었는데, 이코노미석에 함께 앉아 게임하며 가자는 친구의 말을 거절하지 못해 10시간 넘게 이코노미석에 구겨져 앉아 오기도 하고, 결혼 후 어려움에 처한 친구의 부탁에 나 몰래 돈을 빌려주기 위해 대출까지 받는, 늘 남을 배려하고 본인의 손해를 감수하는, 그런 '착한' 사람.


그래서 읽는 내내 화자의 아버지에게 더 화가 났던 것 같다. 우리 아빠가 생각나서, 엄마가 불쌍하고 딸의 답답한 마음이 이해돼서. 민중을 돌봐야 한다는 사람이 어찌하여 본인 가족 하나 돌보지 못하는 것인지. 자기 식구 한 해 먹거리와 딸의 대학 등록금이 달린 모내기는 내팽개친 채 피 한 방울 안 섞인 동네 지인의 시신 수습을 위해 한달음에 자리를 박차고 나서는 담대함에 진저리가 쳐졌다. 예상대로 그 벌은 몸이 성치 않은 어머니가 또 온전히 받았다. 밤새도록 못다 한 일을 마무리하고 무릎이 아파 끙끙대며 우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내 어머니를 보는 양 가슴이 아팠다.


사무치게,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하지만 누군가 그러더라. 미움도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고. 나는 어린 시절 이따금씩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또 지독하게 사랑했다. 그러니 결국 또 아버지를 닮은 남자를 만났겠지. 아버지가 사실 가족을 외면한 적이 없었다는 것도, 늘 사무치게 우리를 사랑했다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마 화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매일 밤 클레멘타인을 부르며 얼마나 많이 울었을지, 얼마나 그녀를 그리워했는지 그녀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 실은 아버지를 가슴 깊이 존경하고 또 사랑해 왔다는 것이 그녀의 글 곳곳에서 느껴졌다. 언뜻 보면 비하하고 조롱하는 듯 보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따스한 시선은 숨겨지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그녀의 글 곳곳에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기실 어머니의 사회주의란 첫사랑, 좀 더 풀어쓰자면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한 자도 인간 대접받는 세상에 불과했다. 신자유주의 대한민국도 그 정도는 해준다.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사회주의란 그저 지나간 첫 남자가, 지나갔으므로 가장 그리운, 뭐 그런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화자의 아버지에게 있어 사회주의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아버지를 허망한 죽음으로 몰아넣고, 본인의 청춘과 정자의 활동성을 모두 바치고, 하나뿐인 딸을 사랑하는 남자와 떼어놓게 만들고, 평생 일가친척들의 원망 속에서 살아내도록 만든 그것이 아버지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어쩌면 그것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그저 아버지의 삶을 지탱해 준 환타지적 믿음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화자의 어머니에게 사회주의가 첫사랑이었던 것처럼. 놓아버리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봐, 본인의 삶이 너무 무의미해질까 봐 두려워 끝끝내 놓을 수 없었던 고집은 혹시 아니었을까. 만약 사회주의를 몰랐던, 싱그러웠던 소년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고작 사 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옥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 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사실 처음엔 이 책에 계속 등장하는 '빨갱이' 혹은 '빨치산'이라는 단어가 좀 불편했다. 대구 출신 어머니와 보수 성향이 강한 충청도 괴산 지역 출신의 아버지에게 어릴 적부터 세뇌를 당한 탓인지 '빨갱이'나 '공산주의'라는 단어에 심리적 거부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내가 '빨갱이'라는 단어에서 느낀 불편함이 사실 단순한 불편함이라기 보단 외면하고 싶은 역사에 대한 자기반성과 슬픔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그리고 분단.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어낸 우리 조부모님 세대와 끝없는 분열의 칼날 위를 맨발로 걸어온 우리 부모님 세대가 이유도 모른 채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며 흘려야 했던 그 핏방울들이 '빨갱이'라는 단어에 생생하게 서려있는 듯하다.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지지했던 사람도,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했던 사람도 사실 그저 평범한 우리 이웃이었을 뿐. 운이 나쁘게도 그 시절 그곳에 태어나 질곡의 역사에 휩쓸렸을 뿐이다. 그들 모두가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동료이자 친구였다. 일부는 이유도 모른 채 선택했고, 일부는 싸워냈지만, 대부분은 영문도 모른 채 피를 흘리고 가족을 잃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 그 시대를 살아낸 모두가 피해자였고, 패배한 쪽은 잔인하리만치 과도한 희생과 눈물을 대가로 치러내어야 했다. 여전히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으랴. 어쩌면 지금도, 특정한 목적을 가진 이들의 왜곡으로 인해 피 흘리고 찢긴 채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이따금씩 그런 생각이 들어 괴롭기도 하고 많이 아프기도 했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화자는 장례식장에서야, 아버지와 이별하는 날이 되어서야 진정으로 아버지를 이해하며 화해의 손길을 내밀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가 가진 천 개의 얼굴 중 그녀가 몰랐던, 아니, 알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또 다른 얼굴들을 마주하면서 그녀는 '실패한 사회주의자'가 아닌 두툼한 누룽지를 만들어주던 어린 날의 아버지를, 이웃들의 영웅이자 구원자였던 아버지를, 가부장제와 소시민성을 극복해 낸 진정한 혁명가로서의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아버지가 그녀에게 남긴 유산은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가 아닌, '선의의 결과와 상관없이 오직 그 선의만을 믿으라'는 가르침, 사람들 속에서 딸이 진정으로 사람들을 믿고 사랑하며 살아가길 바라는 아버지의 따스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유물론을 믿는 아버지에게 죽은 뒤 장례식장에서 누리는 호사와 감사, 딸의 용서와 이해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지만, 적어도 그녀의 남은 삶에는 많은 의미가 있겠지. 아버지가 남겨준 크고 작은 인연들은 그녀에게 더 이상 부담스러운 짐이 아니라, 그녀 삶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나는 우리 아버지의 천 가지 얼굴 중 과연 몇 가지를 보았을까? 감히 상상하기 조차 싫지만, 언젠가 아버지와 이별하게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의 어떤 모습을 떠올리며, 어떠한 추억을 꺼내보게 될까? 다만 확실한 건, 나는 화자처럼 죽어서야 아버지와 화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아주 뻔한 이야기지만 있을 때 잘해야지. 나의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남자이자, 한 인간으로서 '정한선'의 얼굴을 조금 더 많이 마주하고 사랑하고 싶다. 여전히 내 아버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않지만, 그래서 이따금씩 아버지를 또 미워할지도 모르겠지만.


2022년 12월 16일, 열 번째 책당모의♥


[발제문] by SSM

1. 이 책의 작가는 아버지의 삶을 관찰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어쩌면 미웠을 때도 있고, 또 안쓰럽기도 했을 애증의 존재였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작가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과 아버지를 이해하는 과정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내 아버지라는 존재는 본인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작가와 어떤 부분에서 공감을 느꼈나요? 


2. 어릴 때는 부모님의 행동들이 정말 이해가 안 되고 답답해 보일 때까지 있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그때의 부모님을 이해하게 된 경험이 있다면 공유해 주세요.


3. 기억나는 일 중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가장 처음 겪은 적은 언제인가요? 누군가의 죽은 후 그 사람과의 이별을 위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눠봐요.


4. 이 책에서 아버지와 박 선생은 가치관이 서로 달랐지만 둘도 없는 친구로 남게 되었습니다. 친구를 사귈 때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만약 가치관이 다른 누군가와 친구를 해본 적이 있다면, 어떤 점이 좋았고 어떤 점이 힘들었나요? 


5. 나의 장례식에 대해 한번쯤 상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만약 내가 내 장례식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이었으면 하는지 한번 고민해 보고 공유해 주세요.


6.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구절 하나를 선정하여 왜 그 구절이 좋았는지 공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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