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평
*스포주의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중략)...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룰루 밀러의 아버지는 인간은 '혼돈'이 지배하는 우주 속 한낱 먼지와 같은 존재일 뿐, 이 세상에 중요한 의미나 영원한 질서 따위는 없다고 그녀에게 가르친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 진리가 그녀를 보다 자유롭게, 보다 인생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길 바랐다. 그것이 그녀에게 인생에 활력을 불어넣고, 더욱 인간을 대범하도록 만드는 마법과도 같은 주문이 되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넌 중요하지 않다'는 아버지의 말이 어린 그녀에게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그녀는 종종 허무주의에 빠져 허우적댔고, 안식처를 찾아 헤맸다. 그녀에게는 무질서와 혼돈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다시금 살아내야 하는 이유가, 암울한 날들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줄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절망 속에서도 바늘을 집어 든, 세상의 혼돈에 더욱 강한 의지로 반격해낸 분류학자 '데이비드 조던'을 만난다.
처음에 난 이 책이 데이비드 조던의 끈질긴 사투와 눈부신 업적에 감명받은 작가가 삶의 의미를 다시금 발견해내며 쓴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수많은 책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했던 뻔하고 지루한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여태껏 읽은 책 중 가장 소름 끼치는 반전을 가진 책이었다.
겸손을 유지하라는 수천 년 이어져온 경고는 잊어라. 어쩌면 이것이 신이 없는 세계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지속적으로 오만을 복용하는 것이야말로 실패할 운명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보여주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이 부분을 읽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겸손하다기보다는 자기기만과 자기고양에 능숙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남들보다 적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성취를 이뤄왔던 것이 다 이 자기기만의 긍정적 착각 효과 때문이었다며, 마치 깊은 깨달음을 얻은 양 설레었다. 하지만 이윽고 내가 뒤통수를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조던의 재능 중 특히 양날을 지닌 재능은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설득하고, 그런 다음 무한해 보이는 에너지로 목표를 추구하는 능력이다. (…) 그는 자신의 관용과 관대함을 자랑스러워했다. (…) 하지만 조던은 파리 한 마리를 잡는 데 대포알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문장 이후 책은 급격한 반전을 맞는다. 작가에게 삶의 의지를 다시금 활활 불타오르게 해 줄 선지자일줄 알았던 그가 사실은 극악무도한 빌런이었던 것이다. 이때 룰루 밀러가 느꼈을 절망이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나 또한 절망했다.) 곱슬머리 남자를 비롯하여 모든 삶의 의지를 잃어가던 그녀를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 줄 유일한 희망, 그녀가 롤모델로 삼아 분주히 좇아가고자 했던 데이비드 조던. 그가 알고 보니 살인자(혹은 살인을 의도적으로 은폐한 자)인 데다, 끔찍하고 심지어 '비과학적'인 우생학 이론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다니.
지구에서 생물의 배열을 결정하는 자연선택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자마자, 그는 인류의 지배자 인종을 선별할 수 있도록 그 힘을 조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요컨대 가난, 범죄, 문맹, “정신박약”, 방탕함 등 그가 혈통과 관련된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특징들을 교배함으로써 말이다. 그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살시키는 이 기술을 “우생학”이라고 불렀다.
사실 우생학이라는 단어를 들어보긴 했으나, 이토록 끔찍한 이론인 줄은 몰랐었기에 우생학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 읽을수록 놀랍고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다른 나라도 아닌 미국에서, 조선시대도 아닌 20세기에, 이러한 이론이 법적으로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잔인한 불임시술이 이루어졌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수용소가 실재했다는 것이, 심지어 그 수용소가 불법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운영되었던 정부 산하 시설이었다는 것이 마치 공상과학영화 속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 끔찍한 일을 겪고 나와 소박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 메리의 이야기를 읽을 때에는 소름이 마구 돋았다가 분노와 슬픔의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멍게는 정말 하등한 생명체일까? 지구상의 점일 뿐인 우리가 이 우주의 속성과 큰 뜻을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메리는 아이를 키우기에 정말 부적합한 인물이었을까?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이 지구를 더욱 큰 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데이비드 조던은 성공을 위해 너무 많은 오만을 복용했던 나머지, - 그의 도덕성은 차지하고라도 - 그가 신봉해마지 않는 과학을 저버리는 행위, 과학자로서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저질렀다. 나는 그런 자들을 과학자라고 감히 부를 수 없을 것 같다.
아빠, 이 책은 아빠를 위한 책이에요.
책장을 열자마자 추천사 앞에 나왔던 문장이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문장인데, 책을 다 읽은 후 이 문장을 다시 보니 다른 감동으로 읽힌다. 아버지의 삶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그리고 아버지의 '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된 룰루 밀러. 그녀는 아버지로 인해 인생의 의미를 잃고 괴로워했지만, 본인의 롤모델과 본인이 갇혀있던 세상을 깨부수고 더 큰 세상으로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가 별을 버리고 우주를 만났던 것처럼, 데이비드 조던과 아버지, 물고기를 버려낸 후 진정한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첫 독서모임 책이었던 데일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 서평에 이런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찬물 세안이 좋다고 떠들어대 10년을 찬물로 세수했더니, 어느 날 그 세안법이 피부를 약하게 만드는 주범이라더라. 또 우유가 성장에 좋다 하여 열심히 먹었더니, 어느 날 우유가 암을 유발할 수도 있다더라. 하물며 '과학'과 '의학'도 이럴진대, 삶의 방식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그래서 나는 자기 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뭐 그런 글을 썼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도 비슷했다. 역시 과학도 항상 맞는 건 아니야. 우리의 직관은 종종 중요한 것들을 가리곤 한다. 그러니 그냥 내 멋대로 -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며 (나에게 특히 필요한 다짐) - 룰루 밀러의 아버지처럼 살고 싶다. 광활한 우주 위의 티끌만 한 점일 뿐인 우리 인간이 이 짧은 생에 알아봤자 무엇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알려고 발버둥 칠수록 이해하려 신경을 곤두세울수록 괴롭고 외로워질 뿐이다. 물고기가 어류이면 또 어떻고, 척추동물이면 또 어떤가. 우리가 무슨 이름을 붙이건 물고기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름을 붙이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어떤 분류를 할지라도 그들은 거기에 존재할 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무엇이라 부르며 손가락질 하건, 내가 어떤 MBTI로 분류되건 나는 나일뿐이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다정하게 흔들어주는 손, 연필로 그린 스케치, 나일론 실에 꿴 플라스틱 구슬들—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 (중략)...
바로 그때 그 깨달음이 내 머리를 때렸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깨달음. 애나가 중요하다는, 메리가 중요하다는 말. 혹은 이 책을 읽는 당신이 중요하다는 말.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자연을 더욱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식이다.
... (중략)...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우리는 이 우주에서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한낱 먼지일 뿐이다. 하지만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당신이라는 우주에서, 그리고 당신은 나라는 우주에서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존재임을.
(*) 좋았던 문장이 많아서 인용을 많이 했다. 특히 마지막 인용 부분은 너무 좋아서,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다. 나에게 정말 많은 깨달음을 주었던 인생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나에게 중요한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발제문] by JSY
1. 눈에 띄지 않던 소년 데이비드 조던은 아가시라는 스승을 만나 본인의 관심과 능력에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죠.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일에 집착해 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러한 일에서 생각지도 못한 의미를 찾거나 소득을 얻게 된 경험, 혹은 작은 의미부여가 여러분의 인생에 뜻밖의 변화를 가져온 경험이 있다면 이야기해주세요.
2. 벼락으로 인한 화재사고와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등 예상치 못한 혼돈으로 인해 그가 평생에 걸쳐 이뤘던 업적들이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하지만 조던은 그때마다 혼돈의 공격에 더욱더 강한 힘으로 반격하는 특유의 방식으로 대응했는데요. 당신은 이러한 절망의 상황에서 데이비드 조던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나요? 데이비드 조던을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유사한 경험이 있다면 공유해주세요.
3. <8. 기만에 대하여>에서 작가는 자기기만(긍정적 착각, 높은 자존감, 인지적 결함)의 가치와 위험성에 대해 매우 자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기만을 경계하는 겸손한 사람인가요? 혹은 긍정적으로 왜곡된 세계관이 주는 이점을 이용하고자 하는 자만심이 강한 사람인가요? 어떤 성격이 성공에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시나요?
4. 데이비드 조던은 기괴하게 생긴(물리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검은 물고기에 자신의 이름을 따 ‘아고노말루스 요르다니(Agonomalus jordani)’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싶은 생명체가 있나요? 어떤 동물, 혹은 식물이 당신과 가장 닮았나요?
5. 룰루 밀러의 아버지는 별들을 포기함으로써(본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자신만의 도덕성을 발명할 자유를, 자기가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모든 규칙을 무시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반면 룰루 밀러는 아버지의 그런 가르침으로 인해 허무주의에 빠져 괴로운 시간들을 보내야 했는데요. ‘우리는 점 위의 점 위의 점이다’라는 명제에 동의하시나요? 이 명제가 여러분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말해주세요.
6. 아가시는 '다원발생설'을 극렬히 옹호했고, 데이비드 조던은 비과학적이고 끔찍한 이론인 우생학의 사회적, 법률적 기반을 닦아낸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업적은 여전히 과학사에서 유의미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과 같이 업적과 기량은 뛰어나지만 도덕적으로 큰 결함을 가진 자들을 우리 사회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데요. 당신은 데이비드 조던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요? 도덕적 결함이 발견된 위인, 과학자 혹은 예술가들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요?
7. 사람들은 분류하기를 좋아합니다. 어류와 조류, 포유류를 구분 짓는 분류학자나 분기학자가 아닐지라도 우리는 ‘유용성’이라는 목적 하에 인종과 지역, 성격적 특성에 따라 끊임없이 사람들을 구분 짓곤 하죠.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요즘 유행하고 있는 MBTI도 이렇게 모든 것을 분류하고 이름표 붙이기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이 잘 드러난 사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분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전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여러분의 의견이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