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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라푼젤 Apr 26. 2022

여전히 진행 중인 페스트, 당신의 영웅은 누구인가요?

알베르 카뮈 <페스트> 서평

(*) 스포주의


때때로 현실은 소설보다도 더욱 소설 같은 법이다. 전대미문의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나는 질병 자체 보다도 사람들의 광기에 대한 두려움에 자주 휩싸였다. 절대적인 수량 부족과 매점매석으로 마스크와 알코올 가격이 날로 폭등했고, 서양권에선 동양인이 혐오와 폭행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우한 교민들의 입국을 반대하는 플랜카드가 여기저기 나부끼고, 보건부 장관의 옷이 찢겨나갔다. 나라와 언론이 앞장서 개인의 사생활을 낱낱이 까발리고, 마치 죄인을 다루듯 넘버링하며 확진자들에게 주홍글씨를 새겼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평화로웠던 오랑시에 죽은 쥐가 출현하며 시작된다. 페스트가 처음 발병한 후 절정에 이르고, 끝내 소멸되기까지의 여러 비극적 상황들을 꽤나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소설이 아니라 마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다큐를 읽는 듯했다. 80년 전에 쓰인 이 책은 마치 오늘날 코로나 시대의 예고편이라도 되는 듯 현실과 많이 닮아있었다.


이 소설에는 다양한 성격과 직업을 가진 여러 인물 군상들이 등장한다. 사리분별이 분명하고 사명감 넘치는 의사 리우, 덕망 높은 판사 오통, 우연히 이곳에 흘러들어온 외지인 신문기자 랑베르, 본인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보건대를 만들어 질병과의 싸움에 앞장선 타루, 박학다식하고 존경받는 파늘루 신부, 본인의 맡은 바 최선을 다하기 위해 늘 애쓰는 그랑, 페스트라는 불행 속에서 이득을 취한 코타르 등. 우리가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한 번씩은 마주했을 법한 인물들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심리와 행동을 지켜보는 것이 꽤 흥미로웠다.


이 소설을 읽으며 다소 씁쓸했던 것은 서두에서도 밝혔 듯 우리의 현실이 때로는 카뮈의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더욱 잔인했다는 사실이다. 페스트를 신이 주신 형벌이라 설교한 파늘루 신부보다 더욱 위험하고 왜곡된 이야기를 펼치는 성직자들이 있었고, 언론은 조회수에 목말라 혐오를 조장하는 데 앞장섰다. 오통과 같이 신의성실한 지도자를 찾기가 쉽지 않은 데 반해 코타르처럼 코로나를 이용해 본인의 이득을 취하려는 야비한 인간들은 넘쳐났다. 당연하게 누리던 자유로운 일상을 2년 넘게 저당 잡혔으며, 정부의 거리두기 정책은 특정 업종의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희생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각박한 코로나 현실에서도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영웅이 존재했다. 우한 시민들의 귀국을 환영하고 지지한다는 일부 주민들의 플랜카드가 내걸렸다. 수많은 의료진들이 자진해서 대구를 찾았고, 시민들은 고립된 대구를 위해 마스크와 식량물자를 기부했다.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지 않는 구석에서도 조용히 그러나 너무도 바삐 본인의 일을 해낸 수많은 의료진과 공무원들이 있었다. 타의로든 자의로든 우리 시민들은 열심히 마스크를 썼고, 자영업자들은 눈물을 머금으면서도 성실하게 거리두기에 동참했다. 그들 덕에, 오랑 시민들이 그러했듯 우리 역시 재앙의 종식 앞에 어느새 다가서 있다.


인간이 소위 영웅이라는 것의 전례와 본보기를 세워놓고 싶어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반드시 이 이야기 속에 한 사람의 영웅이 있어야 한다면, 서술자는 바로 이 보잘것없고 존재도 없는 영웅, 가진 것이라고는 약간의 선량한 마음과 이상밖에 없는 이 영웅을 여기에 제시하고자 한다.


서술자는 글에서 리우나 타루가 아닌 '그랑'을 영웅으로 꼽는다. 사실 영웅의 '사전적 의미'로 본다면, 그랑보다는 리우와 타루가 영웅으로 칭송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들은 본인을 내던져 환자를 치료했고, 보건대 일에 앞장섰다. 오랑시에 만약 '유퀴즈'가 있었다면, 아마 리우나 타루 같은 사람들이 섭외 1순위가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그랑' 정도는 될 수 있다. 리우나 타루가 되기 위해선 큰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그랑'이 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선량한 마음과 성실성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마 그것이 서술자가 영웅주의를 경계하며, 그랑을 추켜세운 이유일 것이다. 의사들과 보건대의 끊임없는 노력과 혈청이 페스트를 종식시키는데 앞장선 것은 사실이지만, 시민들의 연대의식과 협조가 없었다면 페스트는 결코 종식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재앙과 불행은 선량한 이들에게 예고 없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페스트 균이 서랍이나 책장 속 그 어딘가에 잠자코 숨어있듯이, 어느 날 갑자기 코로나가 찾아와 우리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했듯이 말이다.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재앙과 불행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작은 영웅이 되는 것뿐이다. 전 지구적 재앙은 한 두 사람 영웅의 힘 만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다. 각자의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본인의 일을 충실히 해내며 약간의 선량함을 사회에 더해줄 수많은 작은 영웅들이 필요하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 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오랑시에서 '공식적으로' 페스트는 종식되었지만, 리우는 아내와 친구를 잃었다. 페스트가 종식되고 평화가 찾아오더라도 그 슬픔은 결코 종식될 수 없을 것이다. 코로나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지만,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했다. 코로나로 한순간에 실업자가 되었거나 공들여 시작한 사업을 접었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우울함에 빠져 상처받았던 이들에게 여전히 코로나는 현재 진행 중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회로부터 낙인찍혀 이유 없는 비난을 감내해야 했던 사람들의 상처는 무엇으로 치유받을 수 있을까?


유래 없는 팬데믹 속에서 우리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질병 그 자체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미움과 분노, 불안과 불신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페스트도 코로나도 약해지고 종식된다. 그러나 그 불행을 견뎌내는 시간 동안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가질 후유증의 깊이는 달라질 것이다. 서로를 끊임없이 미워하고 상처 내었던 우리는 당당하게 코로나로부터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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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는 아내와 친구를 잃었지만, 페스트를 통해 우정을 확인했고, 씁쓸하나마 소중한 추억들을 얻었다.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자 하는 얕은 마음으로 의사가 된 그였지만, 페스트를 겪으며 그는 의사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한 단계 더 성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2년 넘게 지속되었던 코로나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남겼을까. 


우리는 곧 평범했던 일상을 다시 찾고, 자유와 가벼운 숨이 주는 행복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리우가 그랬던 것처럼 아직 어디선가는 코로나가 진행되고 있음을, 어느 날 또 다른 불행이 노크도 없이 찾아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방심한 채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내어 옮겨질 수 있는 것은 병독 만이 아니다. 미움과 악한 마음은 병균보다도 더욱 가벼워서 쉽게 옮겨지고, 페스트보다 더욱 처절하게 다른 사람을 파괴할 수 있다. 


본인의 자리를 성실하게 지켜내며, 다른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 상처받은 이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 선량한 작은 노력을 기울이는 모든 사람들이 이 시대의 불행을 막아낼 진정한 영웅이다. 


2022년 4월 11일, 두 번째 책당모의♥



<발제문> by KHJ

1. 가장 인상 깊었던 등장인물은 누구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와 가장 비슷한 성격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2. 서술자가 특히 공들여 묘사한 장면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어떤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나요? (랑베르와 리유의 추상에 대한 갈등, ㅇㅇ 아들의 죽음, ㅇㅇ의 죽음 등) 


3. 페스트는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2020년 코로나 시대와도 비슷한 점이 많은데요. 몇십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모습과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4. 다시 코로나와 같은 팬데믹 상황, 우리를 ‘감옥’에 갇히게 만드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대처하고 싶은가요? 이 책을 읽고 생각의 변화가 생겼다면 이야기해주세요. 


5.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329p)” 카뮈가 말하고 싶은 페스트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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