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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라푼젤 Nov 28. 2024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서평


스포주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는 글이니 소설을 읽지 않으신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아버지가 묻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나는 큰 소리로 답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가 묻는다.
더 나은 것이 많은데, 왜 당신이냐고.

나는 수줍어 조그맣게 말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로 태어나, 다시 나를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아버지가 운다.


나는 슬픈 소설이나 영화를 구태여 찾지 않는다. 싸구려 로맨틱 코미디를 봐도 눈물을 줄줄 흘리는 사람이니까. 작정하고 너를 울리겠다 덤비는 작품을 보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이 작품이 이번달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되었을 때 걱정이 앞섰다. '소아조로증'을 앓고 있는 아이와 그 '가족'을 주제로 한 내용이라니. 통곡하며 책을 읽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프롤로그에서부터 오열했다.


작가의 필력은 가히 어마어마하다. 지나치게 유려한 문체가 사실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나는 쉬운 단어로 쓰인 담백하고 직관적인 문체를 좋아한다.), 어떻게 이 단어를, 이 상황을 이다지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아름이가 자신만의 단어장에서 어떤 단어를 꺼내 '만져볼 때마다' 단어 하나하나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아래 인용한 '추파'에 대해 쓴 문단이 하나의 예다.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단어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의미들을 품고 있었다니. 작가의 필력에 놀라고, 작가가 단어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감탄하고, '글'을 대하는 태도에 감동했다.


어디선가 까르르 박꽃 같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돌아보니 젊은 레지던트 하나가 간호사들에게 농담을 걸고 있었다. 나는 내 속 단어장에서 ‘추파’라는 낱말을 꺼내 만져보았다. 가을 추, 물결 파. 가을 물결.

‘예쁘구나, 너. 예쁜 단어였구나……’

그런데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보내는 눈빛을 추파라고 하다니, 하고많은 말 중에 왜? 그러자 곧 그런 것도 모르느냐는 듯 바람이 나를 보고 속삭였다.

‘가을 다음엔 바로 겨울이니까.’

불모와 가사(假死)의 계절이 코앞이니까, 가을이야말로 추파가 다급해지는 시절이라고…… 귓가를 뱅뱅 돈 뒤 사라졌다. 나는 오래전 추파를 추파라 부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가만 웃었다. ‘아! 만권의 책을 읽어도, 천수의 삶을 누려도, 인간이 끝끝내 멈출 수 없는 것이 추파겠구나’ 싶어 흐뭇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름이와 편지를 주고받던 동갑내기 소녀 '서하'가 사실은 30대 중반의 시나리오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몽글몽글한 감성은 모두 와장창 깨져버렸다. 둘 사이의 편지가 길어지는 게 좀 지루하고 유치한 감은 있었지만, 아픔으로 인해 - 몸이든 마음이든 - 너무 빨리 늙어버린 아이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위로받았다. 내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어떤 식으로 둘 사이의 이야기가 마무리될지 궁금하면서도 두려웠다. 그런데, 서하라는 존재가 거짓이었다니. 정신 나간 어른의 욕심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었다니. 마치 작가가 나를 향해, '이건 다 쇼야. 정신 차려!'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름이는 이겨낼 테니까. 나보다 훨씬 더 성숙한 아름이는 그 남자를 원망하고 저주했으나 결국 용서했을 테니까. 병실에 찾아온 듯한 남자에게 아름이가 건넨 이야기를 들으며 아름이는 '상실'의 의미를 깨닫고 또 이겨냈구나 싶었다. 작가가 아름이의 눈을 멀게 하고 철저하게 혼자가 되도록 만들었을 때도 괜찮았다. 그런데 엄마의 임신이라니. 오늘내일하는 아이를 두고 임신이라니? 그리고 그걸 들키다니. 정말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도 안 된다. 전쟁통에도 아이는 태어나고, 34살 한창나이의 부부이니 욕정이 없을 수 없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말 아무리 그래도 아름이한테 렇게까지 잔인했어야 했을까? 부모가 나와의 이별을 준비하면서, 어쩌면 나를 대체하게 될 - 물론 누구도 아름이를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 아이를 만들었다는 것을 17살 소년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무리 그가 빨리 늙었을지언정, 아무리 그가 성숙할지언정.


나는 스파이더맨이 우주를 구하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모든 친구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을 때(이렇게 줄거리를 쓰니 더 유치해 보이네^^), 스파이더맨이 너무 가여워 몇 날 며칠을 괴로워했다. 그리고 2년도 넘은 시점에 독서모임에서 그 이야기를 하다가 또 펑펑 울어버렸다. 지독한 과몰입러, 감정 과잉 환자다. 초등학생도 속지 않을, 누가 봐도 판타지인 영화 속 가상의 인물에게도 이 정도로 감정을 이입하는데, 생생한 필체와 있을 법한 소재로 마치 실화 바탕 소설인 양 착각하게 만든 이 이야기는 오죽했을까. 작가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이 책을 만난 게 끔찍했다. 살면서 읽은 책 중 가장 최악의 책으로 꼽고 싶었다. 작가님, 정말이지 그렇게 다 뺏어가야 했나요? 그렇게까지 잔인해야 했나요? 묻고 싶었다.


 ‘……어릴 때 나는 까꿍놀이라는 걸 좋아했대. 아버지가 문 뒤에서 ‘까꿍!’ 하고 나타나면 까르르 웃고, 감쪽같이 사라진 뒤 다시 ‘까꿍!’ 하고 나타나면 더 크게 또 웃었다나 봐. 그런데 어느 책에서 보니까, 그건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기억을 저장하는 거라더라. 그런 걸 배워야 알 수 있다니. 그렇게 작은 바보들이 어떻게 나중에 기술자도 되고 학자도 되는지 모르겠어. 나는 처음부터 내가 나인 줄 알았는데, 내가 나이기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손을 타야 했던 걸까. 내가 잠든 새 부모님이 하신 일들을 생각하면 가끔 놀라워.

……오늘은 네게 꼭 할 말이 있어 편지를 써. 어쩌면 앞으로 네게 메일을 못 보내게 될지도 몰라. 며칠 전 나도 중환자실에 들어오게 됐거든. 그렇지만 다시 나갈 때를 대비해 이곳에서 나, 항상, 네게 쓸 편지를 궁리해두고 있을게. 그리고 이곳을 벗어나면 제일 먼저 너에게 소식을 전할게. 그러니 당분간 내가 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까꿍’ 하고 짓궂게 사라진다 해도, 어릴 때 우리가 애써 배운 것들을 잊지 말아 줄래? 그사이 나는 네게 들려줄 얘기들을 계속 모아두고 있을게. 그리고 언제고 너의 행운을 빌게. 그럼 또 봐. 안녕.’


엄마가 자신을 지우기 위해 밤새도록 운동장을 돌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서하가 가짜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부모 앞에서 전혀 내색하지 않은 아름이었다. 모든 아픔을 혼자 감당하며 속으로 삭이던 아름이었다. 부모님이 쓴 허접한 서하의 편지에 답장하며 도리어 부모님을 위로하던 아름이었다. 사실 서하에게 쓴 편지는 부모에게 쓴 마지막 편지가 아니었을까? 자신을 이만큼 키우기까지, 자신이 잠들었던 시간들 속에도 당신들이 얼마나 부단히 애써왔는지 잘 안다고, 까꿍놀이하듯 내가 당신들 눈에서 사라져도 슬퍼하지 말라고, 내 마음이 늘 당신들 곁에 남아있겠다고 말하고 싶었으리라. 그리고 아름이는 '보고 싶을 거예요'라는, 너무도 아름이답고, 또 가장 완벽한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떠난다. 부모가 아름이를 키우는 동안 아름이도 부모를 키워냈다. 모든 아이들이 그러하듯.


마음이 아플 땐 반드시 아이처럼 울어라


나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트로트나 성인가요를 부르는 아이들은 별로 어여삐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다.) 지나치게 성숙한 아이들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나이대에 맞는 싱그러움과 아이다움을 사랑한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실감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아이다울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축복이다. '아이처럼' 목놓아 울고, 떼쓰고, 악다구니를 쓰는 것도 그 나이대에만 할 수 있는 특권이다. 그리고 17살은 여전히 많이 울어도 되는 나이다. 유치하고 보잘것없는 일들에 울고 웃어야 할, 때로는 반항하고 뾰족해지며 사춘기라는 터널을 지나야 할 나이.


어린 시절 아버지의 보증으로 인해 사업이 기울고 집안 상황이 안 좋아졌던 때가 있었다. 사실 나는 그때의 어려움이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한 가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이었나? 아빠 친구분들이 집에 놀러 오셔서 소주 한 잔 하며 나누는 이야기를 잠결에 듣게 되었다. 별 재미없는 이야기들이었는데, 갑자기 아빠가 '우리 소영이는 장난감 사달라고, 용돈 달라고를 안 해. 그게 참 서운하네'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아마도 어린 마음에 집안 상황 눈치를 보는 내가 안타까우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몰래(?) 그 얘기를 들은 얼마 후 용돈을 더 달라고 했더니 엄청 기뻐하며 환하게 웃으시던 얼굴이 기억에 남아 있다.

 

나도 부모가 되고 보니 그때의 아버지 마음을 알겠다. 너무 빨리 성숙해져 아이답지 못한 자식의 모습을 보는 것은 부모로서 너무도 마음 아픈 일일 것이다. 그러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과 그보다 더 끔찍한 정신적 고통을 버티며, 늙어버린 몸을 지탱하기 위해 마음 역시 더 빨리 늙어버려야 했던 아름을 보는 한대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마음이 아플 땐 반드시 아이처럼 울라고 부탁하는 그의 당부가 절절하게 공감되었다.


심지어는 오랫동안 그런 대우를 받고 싶었으면서도, 아버지는 자신이 그걸 진심으로 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는 인생이 뭔지 몰랐다. 하지만 어른이란 단어에서 어쩐지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건 알았다.


결말에 다다를 때까지도 나는 뭔가 반전이 또 있을 것이라고, 숨겨진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기다렸다. 그래, 이 책은 동화가 아니니까. 세상 모든 소설이 아름답기만 할 수는 없는 거라고 마음을 다독였지만, 끝내 추락하기만 하는 아름의 상황에 목이 매였다. 아직까지도 동화 같은 이야기, 아름다운 기적, 권선징악 따위의 교훈을 담은 결말을 바라는 것을 보면 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 건가 싶기도 하다. 아직도 청소년인 거냐고, 아직도 꿈을 꾸냐고, 유치하게도 어린아이 상태에 감성이 여전히 머물고 있는 거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싶기도 하다. 서른 중반에도 나는 여전히 어른이 되기 싫은 걸까. 근데, 꼭 어른이 되어야만 하나? 


지우 '아이다움'을 마음껏 누렸으면 좋겠다. 남들보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울었으면 좋겠다. 오래오래.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아름이가 너무 빨리 크지 않기를, 더 아이다울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주머니에 넣어두고선 두고두고 꺼내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았다. 요즘 가장 궁금한 게 지우의 '지금' 머릿속인데, 엄마 뱃속에서부터 출산 후 말 못 하던 시절까지 아가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지지 귀여운 상상으로 표현해 준 것들이 특히 참 좋았다. 아래는 발췌해 온 몇 문단.


그러나 진짜 두려움의 근원은 따로 있었다. 당시 어머니는 그걸 몰랐지만. 그것은 한 존재를 향한 거대한 사랑의 예감, 그 그림자 속에 드리워진 불안, 그리고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몰라 어느 칸에 넣는 것이 적절한지 알 수 없는 기분 때문이었다.
쿵쿵— 혹은 둥둥—이라도 좋았다. 먼 북소리 같기도 하고, 큰 발소리 같기도 한 무엇. 거대한 몸집을 가진 누군가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듯한 울림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여진(餘震)에 민감한 순록처럼 도망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동시에 춤추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어머니의 심박과 내 것이 겹쳐 가끔은 음악처럼 들려왔던 까닭이다.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네.”
“흔치 않은 일이니까……”
“………”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
“그러니까 너는,”
“네, 아빠.”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나는 그 찰나의 햇살이 내게서 급히 떠나가지 않도록 다급하게 자판을 두드렸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그렇게 써놓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누구도 본인의 어린 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니까, 특히 서너 살 이전의 경험은 온전히 복원될 수 없는 거니까, 자식을 통해 그걸 보는 거다. 그 시간을 다시 겪는 거다.
우리는 도란도란 담소를 나눴다. 평소보단 진지하고 깊은 얘기들이었다. 그즈음, 내 성격은 조금 바뀌어 있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물어보는 습관이 든 거였다. 지금이 아니면 다신 물어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 더 성급해지고 경솔해져도 좋을 것 같았다. 특히 상대가 장 씨 할아버지 같은 분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게 정답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대답 속엔 누군가의 삶이 배어 있게 마련이고, 단지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당신들의 시간을 조금 나눠갖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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