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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건네는 담백한 위로

류시화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서평

by 책 읽는 라푼젤


내가 마지막으로 시를 읽은 것이 언제였더라. 고등학교 때 교과서나 문제집에서 읽은 것을 제외하면 지하철 역사 스크린도어나 광화문 교보문고 광고판에 쓰인 시, 혹은 sns에서 어느 할머님들이 쓰신 시를 우연히 읽은 것이 전부일 것이다. 학창 시절에도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시를 몇 개 외워보라 하면 김소월이나 윤동주의 시, 혹은 정몽주나 이방원의 시조가 입에서 튀어나오긴 할 텐데, 단순히 기계적인 반응일 뿐 마음으로 외워 품고 다니는 시는 한 편도 없는 것 같다.


학창 시절 내내 '시'는 항상 외워야 하거나 분석해야 할 대상이었다. 통째로 시를 암기해서 검사받고, 구조를 분석하고, 은유와 상징을 찾고 해석해서 끝내는 정답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 소설이나 산문도 마찬가지긴 했겠으나, 아무래도 시는 짧은 글 안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가 많다 보니 문제 낼 거리도 많고 그만큼 수험생 입장에서는 더 까다롭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렇다 보니 진정으로 즐겨볼 기회도 없이 멀어지기만 했다. 시는 어렵고 재미없고, 또 뭔가 구닥다리(?) 같다는 편견에 사로잡힌 채...


그런데 왜 갑자기 시집이 읽고 싶어 졌을까? 내 마음에 어떤 바람이 불어 시집을 이번 달 독서모임 주제로 선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갑자기 시집이 읽고 싶어져서 네이버에 '시집 베스트셀러'를 검색해 신작을 골랐다. 신작으로 고른 이유는 ebook의 유혹에 빠지고 싶지 않아서. 왜인지 시집은 종이로 읽어야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이 시집은 내가 태어나 처음 구매해 본 시집이자, 아-주 오랜만에 ebook이 아닌 종이로 읽은 책이 되었다.


나는 짧은 글을 잘 못쓴다. 다들 한두 줄 담백하게 잘도 쓰는 sns에서도 혼자 3절 4절 긴 글을 쓴다. 서평도 늘 글을 끝맺지 못해 밤을 새우기 일쑤. 어디 글뿐이랴, 덜어내지 못한 약속과 과제들로 허우적대는 일이 잦다. 아이를 낳고는 더 심해졌다. 기존의 생활을 놓지 못한 와중에 '아이'와 관련된 과업들이 더해지니 하루 온종일 매일매일이 정신없고 복잡하다. 항상 머릿속은 해야 할 일들과 스케줄 조정으로 분주히 돌아가고 가슴은 내내 시끄럽다.


특히 이번 연말은 역대급이었다. 밀린 강의 촬영과 감사업무, 쏟아지는 연말 모임 속에서 엄마가 아파 간간히 병원에 같이 가드려야 했고, 무엇보다도 드디어(?) 지우가 나를 찾기 시작했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반기고, 손을 잡고 웃어 보이며 애교를 부리는 통에 아이와 더 시간을 보내느라 약속에 늦거나 해야 할 일을 제때 못하는 일일 점점 늘어갔다.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고 있으면 허벅지에 와서 가만히 얼굴을 갖다 대거나 종아리를 껴안는다. 이모와 키즈카페를 갈 때도 내 신발을 가리키며 신으라 명령하고. 이 아이에게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될 것이라는 행복하면서도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온다. 더 많은 일을 놓치게 되거나 내 삶이 더 엉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그런 와중에 시를 읽었다. 가벼워서 좋았고, 언제고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어도 흐름이 끊기지 않아 좋았다. 너무도 뻔한 문장을 몇 번이고 반복해도 질리지 않았다.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도 좋았다. 시집을 덮은 후에 알았다. 나에게는 쉼 같은 시가 필요했다는 것을. 어쩐지 시집에 실린 모든 시들이 내게 살뜰한 위로가 되었다. 내가 느끼는 모든 기쁨과 슬픔, 고통과 희망도 다 긴 여정 속에서 너울거리는 파도의 한 조각일 뿐이라고. 너무 조급해할 필요도 너무 애쓸 필요도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제 아무리 사랑이 넘쳐흐르는 따뜻한 소설이라 할지라도 절대 건넬 수 없는, 다른 종류의 따뜻함이었다.


아이는 나를 시 없이도 살 수 있게 만드는 존재이지만, 더불어 간절히 시를 필요로 하게 만드는 존재다. 앞으로 아이는 내게 더 기대고 더 많이 나를 보고 웃고, 나를 찾겠지. 그 벅찬 행복을 감히 내가 감당해 내려면 중심을 잘 잡아야 할 것이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의 눈빛에 더 많은 함축된 말들이 담겨있는 것처럼, 내게도 그런 담백함이, 덜어냄이 필요할 것 같다. 새해에는 시를 써볼까? 글도, 일정도, 욕심도 덜어낼 수 있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사실 쓰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데ㅎㅎ 여기서 줄여본다.


KakaoTalk_20250131_005140821_01.jpg 2024년 12월 23일, 서른네 번째 책당모의♥


[발제문] by JSY

1. 가장 마음에 남은 시를 여러분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한 편씩 낭송해 주세요.
* 왜 그 시가 가장 마음에 남았는지 간단한 이유도 덧붙여주시어요!


2. 「우리에게는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사건이 있다. 문제는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당신'이 수시로 찾아오는데도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때 '당신'은 연인이나 벗일 수도 있고 절대자일 수도 있으며, 갑작스럽게 닥친 병마나 불행일 수도 있다. 그가 누구고 또 무엇이건, 우리에게는 일상적 삶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과 같은 당신'이 있다. 」 - 이문재 시인, 해설 중에서

살아오면서 '시'가 필요하다고 느낀 적이 있으셨나요? 시 없이는 잘 지낼 수 없게끔 만든 사람 / 혹은 사건이 여러분께도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3. 시를 좋아하시나요? 시가 가진 매력이 무엇인지 이야기 나누어봅시다.
*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와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가 무엇인지를 공유해 주셔도 좋아요.


4. 작가는 슬픔 속에서 기쁨을 찾아내고, 절망 속에서 끊임없이 희망을 쥐고, 걸고, 노래합니다. 대조되는 두 쌍의 단어들이 이 시집에서 유독 짝을 이뤄 자주 등장한 것 같은데요. 여러분은 이 시집에서 어떤 단어가 가장 눈에 들어오셨나요? 만약 여러분이 시를 쓴다면, 어떤 단어를 키워드로 시집을 엮고 싶으신가요?


5.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어봅시다.

- 18p. [그리움의 모순어법]
시집을 읽는 내내 저는 작가가 무엇인가를 계속 그리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너'는 누구일까요. 가시에 손등 찔려가며 탱자 열매 따주었던 그(녀)일까요? 왜 '나'는 곁에 있는 '너'를 계속 그리워하는 걸까요?

- 66p. [시가 써지지 않을 때면]
작가는 시가 써지지 않고 괴로울 때 고흐와 모네와 샤갈을 떠올린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영감을 얻거나 힘을 얻는 존재는 누구인가요?

- 36p. [나보다 오래 살 내 옷에게], 50p. [나의 전기작가에게], 155p. [이 세상 떠나면], 160p. [이제는 안녕], 164p. [나는 작별이 서툴다] 등 몇몇 시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짙게 배어있습니다. 마치 작가가 이승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작가와 비슷한 생각이나 고민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당신보다 오래 살아남아 당신을 그리워할 물건은 무엇일지, 당신의 삶은 어떠했노라고 기록하고 싶은지, 수많은 밤 당신을 위로해 준 - 저승에서 당신을 마중 나올 - 영혼이 있을지 등 '죽음 앞에 놓였을 당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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