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서평
"테이프 까까?"
매 회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TV 프로그램 <나는 솔로>에서 두 남자 출연자가 어떤 상황을 두고 옥신각신하던 중 나온 대사다. 우리야 친절하게 편집된(혹은 의도된) 영상을 보고 있으니 누구의 말이 맞는지 대번 알 수 있지만, 자신의 기억이 온전하고 절대적이라고 믿는 출연자들은 답답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분명 내 기억이 맞는 것 같은데 상대방은 말이 전혀 통하지 않으니 '객관적인 사실'을 간절히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그 문서들은 우리에게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일어났다고 슈트레제만이 생각한 것만을, 혹은 그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원했던 것만을, 아니면 아마도 무엇인가가 일어났다고 그 자신이 생각하고 싶어한 것만을 말해줄 뿐이다. 선별과정을 시작한 것은 서턴이나 베른하르트가 아니라 슈트레제만 자신이었다.
우리가 중세사의 사실들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은 거의 모두 여러 세대에 걸친 연대기 편찬자들이 우리를 위해서 선택해 준 것들이다.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그래서 '의도치 않은' 거짓말쟁이들이 무수히 많이 등장한다. 바로 옆에서 같은 상황을 보고 들은 목격자들의 증언도 늘 제각각이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사실을 곡해하여 오해의 불씨를 퍼뜨리기도 한다. 어디 비단 출연자들 뿐이랴. 안방에서 낄낄거리며 손가락질하는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다. 다음날 지인에게 어제 <나는 솔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한다면, 상당히 많은 부분이 사실과 다르게 전달될 것이다. 특정 출연자를 편애하고 있다면, 왜곡의 정도는 더 심해질 것이고.
그렇다면, 테이프를 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저자의 답은 단호하게 '아니요'다. 다양한 기록물들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 '프로그램의 흥행'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편집된 영상은 당연히 말할 것도 없고, 녹화된 원본이라 할지라도 촬영자의 의도와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똑같은 상황도 누가 찍었느냐에 따라, 언제 찍었느냐에 따라, 어떤 마음으로 찍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기록된다.
사실들은 정말이지 생선장수의 좌판 위에 있는 생선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때로는 접근할 수 없는 드넓은 바다를 헤엄치는 고기와 같다 ; 그리고 역사가가 무엇을 잡아 올릴 것인가는 때로는 우연에 좌우되겠지만, 대개는 그가 바다의 어느 곳을 선택하여 낚시질을 하는지에, 그리고 어떤 낚시도구를 선택하여 사용하는지에 좌우될 것이다─물론 이 두 가지 요소들은 그가 잡고자 하는 어종(魚種)에 따라서 결정된다. 대체로 역사가는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사실들을 낚아 올릴 것이다. 역사는 해석을 의미한다.
불과 며칠 전, 아니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도 이렇게 불완전할진대, 수십 년, 수백 년 전의 사건은 오죽할까.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는 유명한 어구처럼 우리에게 남겨진 기록은 수많은 사람을 거치고 흘러오면서 살아남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에게 '역사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역사가는 그 수많은 조각들을 모으고 이어 붙여 기록 저편에 숨겨진 진실, 진짜 얼굴을 그려내어야 하는 존재이기에. 그리고 그는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좋은' 역사가가 되기 위해서 역사가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고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우선 여러분의 사실들을 곧바로 움켜잡아라, 그러고 나서 해석이라는 물컹한 모래 속에 위험을 무릅쓰고 빠져들어라.
역사가의 기능은 과거를 사랑하거나 과거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서 과거를 지배하고 이해하는 데에 있다.
이 책을 읽기 전, 누군가 내게 '역사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면, 나는 단번에 '괴로운 암기과목이죠 뭐,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온갖 사건과 그에 붙은 복잡한 이름, 수수께끼 같은 숫자들까지. 단순 암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내게 학창 시절 역사 과목은 가장 어렵고, 지루하고 힘든 과목이었다. 나는 지금을 살고 싶은데, 과거 그까짓 거 뭐. 솔직히 그게 왜 중요한가 싶었다. 사학과에 간 친구들은 수업시간에 모여 앉아 연도별로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암기 대회나 하는 줄로 알았다. (친구들아 미안 ^^;;)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역사'를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아주 예전에 쓰인 책이라 번역이 매끄럽지 않았고, 강연을 그대로 옮겨온 책이다 보니 비문이 많아 읽음새도 좋지 않았다. 등장하는 사례들도 하나같이 낯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글에서 역사가로서의 자부심과 열정이 역력하게 느껴졌고, 역사가라는 직업이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역사가는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가설을 설정하고 검증하고 연구하며, 탐정처럼 수수께끼를 풀어내며 해독하고, 아무렇게나 흩어진 퍼즐을 모아 끝내 하나의 스토리를 완성해 내야 하는 사람들이었음을. 그리고 역사란 '사실'의 단순한 나열이나 과거의 답습이 아닌, 끝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그려내는 과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과정, 즉 내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대화라고 불렀던 그 과정은 추상적이고 고립적인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 사이의 대화이다.
역사에서의 진보는 사실과 가치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성취된다. 객관적인 역사가란 이러한 상호과정을 가장 깊이 통찰하는 역사가인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역사가의 올바른 자세뿐 아니라 우리가 역사를 대할 때의 자세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역사가란 역사책을 쓰기 이전에 이미 역사의 산물이자 사회의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대변자이므로 역사서를 읽을 때에는 책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출간일자와 집필일자를 반드시 함께 살펴볼 것을 강조한다. 또한 역사가들은 개별 인물의 성품이나 도덕성에 집중하기보다 그 인물을 탄생시킨 사회 환경에 집중하고, 복합적인 원인 속에서 '궁극적인 원인'을 밝혀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저자의 강의 대상은 누구였을까? 책을 읽다 보니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역사가를 꿈꾸는 사학과 학생들이었을까. 아니면 초보 역사가들이었을까. 이미 왕성하게 활동 중인 현역 역사가들이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역사에 관심 있는 일반 대중들에게 건네는 강연이었을까. 신기한 것은 대상이 누구이건 간에 그다지 어색하지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이 이 책이 어려운 역사철학 책임에도 오랜 기간 많은 이들의 책장에 꽂힐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어찌 보면 우리 모두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구성하는 주인공이자 또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수 없이 많은 기록물을 남기는) 역사가이자, 역사를 읽는 대중이기도 할터이니.
역사란 ‘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찾아내는 주목할 만한 것에 관한 기록’이다.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질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 또한 현재도 과거에 비추어질 때에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과거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 이것이 역사의 이중적인 기능이다.
훌륭한 역사가라면 미래에 관해서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미래를 뼛속 깊이 느끼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역사가는 ‘왜?’라는 질문에 더하여 ‘어디로?’라는 질문도 제기한다.
모든 사실은 역사가들에게 간택될 때만 역사가 될 수 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은 역사적 사실이 되었지만, 우리가 매일 죽을힘을 다해 한강을 건너 출퇴근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되지 않는다. <나는 솔로>에 출연하여 몇 날 며칠을 준비한 노래를 눈물로 선보인다 할지라도 카메라 감독이 찍어주지 않는다면, 10명의 출연자의 5일 1,200시간을 단 10시간으로 편집해 내는 PD에게 간택당하지 못한다면, 그 장면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누가 알까. 어느 날 우리가 한강 위를 달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지. <나는 솔로>에서는 방영되지 못했지만 그 노래를 릴스에 올려 100만 뷰를 받을지. 아니, 뭐 꼭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않더라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미래로 나아가며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 다소 진부한 표현일지라도 아이를 낳고 길러냄으로써, 출근하여 자신의 맡은 소임을 다함으로써 - 비록 그것이 작고 보잘것없는 일처럼 느껴질지라도 - 사회를 정상적으로 굴러가게 만듦으로써 말이다.
카이사르가 그날 혼자 루비콘 강을 건넜다면 역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군대가 있었기에 그것이 역사로 기록되었다. 우리가 카이사르이건, 군대를 구성하는 군인 중 한 명이건 간에 (물론 '진짜' 역사가들에게는, 그리고 History에서는 우리가 카이사르인지 졸개 군인인지가 당연히 중요하겠지만.) 우리는 각자의 역사서에서 언제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다. 우리 가족의 역사서에서는 카이사르보다 윤석열보다 우리의 아픔과 고민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역사서를 채우는 과정에서도 저자의 가르침은 여전히 의미 있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역사가인 우리의 몫이며, 우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 어떤 과거를 떠올리며 어떤 오늘을 살아낼 것인지, 어떤 역사서를 완성해 낼 것인지는 온전히 역사가인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나는 격동하는 세계, 진통하는 세계를 내다보고 나서 진부하기조차 한 어느 위대한 과학자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 ‘그래도─그것은 움직인다.'
[발제문] by SSM
1. 여러분들은 어떤 경로(매체, 교육, 책, 드라마, 유튜브 등)를 통해 역사를 가장 많이 접하셨나요? 여러분이 태어난 이후 기억하는 사건 중, 미래에 역사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건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 있었으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이 책에 의하면 역사는 절대적이고 자명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이는 역사학자가 처한 환경이나 그가 살아온 배경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쓰이는 부분이 많다고 합니다. 어릴 때 알던 역사적 사실이 커서는 다른 관점으로 이해된 경험이 있었나요? 혹은 내가 믿어왔던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이 왜곡되었거나, 잘못된 정보에 의한 것임을 느낄만한 기회가 있었다면 공유해 주세요 (꼭 대중적으로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도, 개인의 경험도 비슷한 사례가 있으면 자유로이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3.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낮았더라면 역사가 변했을지도 모른다는 속설은 클레오파트라의 미모라는 우연의 사건들이 역사를 지배한다는 관점에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이처럼, 한 개인이 역사의 결과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크다고 생각하나요? (이순신, 세종대왕, 히틀러, 한니발 등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공유해 주세요)
4. 나와 다른 세대의 어른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견해가 다른 경우가 많고, 같은 세대 간에도 본인이 사는 국가나 지역에 영향을 받기가 쉬운데, 부모님과의 대화나 외국인 친구와의 대화에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지요? 이런 관점의 차이는 가끔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어떻게 이 상황을 지혜롭게(?) 헤쳐나갔는지 공유해 주세요.
5. 우리는 일제강점기, 6.25 전쟁, 세계 대전 등 국사나 세계사에서 다뤄진 유명한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만,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인들의 민간인 성폭행 사건, 경산 코발트 광산 사건 등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도 많습니다. 특히, 제주 4.3 사건과 같이 일부사건들은 교과서에 등재되지 않았기 때문에 늦게 알려지는 등 결국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임을 부정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균형 잡힌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의 아이들에게는 역사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