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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지 Mar 22. 2020

해커와 화가

"해커와 화가의 공통점은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위시리스트에만 넣어뒀던 <해커와 화가>를 읽었다. 비아웹이라는 스타트업을 창업해 야후에 매각했던 창업자이자 와이 콤비네이터의 공동 창립한 폴 그레이엄의 에세이가 엮인 책이다. 여러 편의 글 중 '해커와 화가'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해커와 화가

해커는 과학자 같은 연구자보다는 화가 같은 창조자에 가깝다.

해커와 화가의 공통점은 우선 그들이 둘 다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사실이다. 작곡가, 건축가, 작가와 마찬가지로 해커와 화가는 좋은 무엇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들은 연구를 수행하지는 않지만, 창조의 과정에서 훨씬 좋은 새로운 기술을 발견하기도 한다.

요즘 보면 실로 해커(기존의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시대이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에도 기발하고 부지런한 해커들은 '코로나 확진자 지도', '마스크 구매 쇼핑몰 리스트' 등의 사이트를 만들어냈다. 사용자 관점을 반영해, 정부나 대기업보다 빠르고 유용하게 말이다. 

덕분에 아이디어만 있다면 바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면에서 개발자라는 직업이 참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진정한 해킹이란 스펙 자체를 창조하는 것이다.

해킹이라는 것은 분명 주어진 스펙을 단순히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정하는 일이 아니다. 진정한 해킹이란 사실 스펙 자체를 창조하는 것이다. 스펙을 만족시키는 최고의 방법은 대부분 그것을 실제로 구현해 보는 것이다.

현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는 직업인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많은 사람들과 큰 시스템을 만들다 보니 역할이 세세하게 나눠져 있고, 개발자가 스펙을 정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아이디어를 제시할 순 있어도 실제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에 시간을 더 쏟아야 하기 때문에 '주어진 스펙을 유연한 시스템으로 설계하여 고성능으로 개발하는 것'이 미션이다. 그러다 보니 직업인으로 일하는 것은 해커와 다소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것이 작은 조직에서 유연하고 강도 높은 노동력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기에 해커로서 일하는 모습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것 같다. 

개발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학생 때 이것저것 프로젝트를 했을 때는 해커라는 창조자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주어진 것을 최적화하여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하는 공학자에 가까워진 것 같다. 후자가 마냥 싫은 건 아니지만 현실적인 사람에 가까워진 것 같다는 아쉬움이랄까.


화가의 작품에 그의 성장이 드러나듯, 해커의 프로젝트도 성장한다.

화가들이 그들의 작품에 남기는 흔적을 보면, 그들이 직접적인 행위를 통해서 배워나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어느 한 화가의 작품을 시간 순서대로 확인해 보면 하나의 작품은 바로 이전 작품에서 학습한 내용을 토대로 구축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완성도가 매우 높은 작품이 있다면 대개 그 작품의 버전 1에 해당하는 작품이 조금 작은 크기로 전에 시도된 적이 있을 때가 많다.

대부분의 창조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소설가나 건축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해커가 하나의 프로젝트를 붙들고 몇 년 동안 일하면서 나중에 새롭게 떠오르는 생각을 프로젝트에 부분적으로 적용하여 개정판을 만들어 나가는 것보다는, 화가와 같이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프로젝트를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 문맥은 꽤 감동(?)을 주었다. 코드로 이루어진 덩어리(물론 시스템에 배포되어 살아있듯이 동작하지만)가 마치 화가의 작품처럼 해커의 성장에 따라 생명력을 가지고 성장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줘서 말이다. 

가끔은 개발한다는 것이 좀 딱딱하고 멋없게 느껴지는데, 나의 성장과 나의 코드들이 함께 성장한다니 조금 더 의욕적이고 재밌게 일할 의지가 생겼다.


열정이 아주 식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단순한 일들을 남겨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해킹이라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순환 구조를 가진다. 때론 새로 시작되는 프로젝트에 감격해서 하루에 열여섯 시간을 일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떤 때에는 재미라고는 도대체 눈곱만큼도 없을 때도 있다.

좋은 작품을 남기려면 이와 같은 순환 구조를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작품의 질은 사용자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수동 기어가 달린 차를 운전해서 언덕을 올라갈 때는 차가 멈추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가끔 클러치를 뒤로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잠깐씩 휴식을 취하는 것은 열망이 식는 것을 방지해 준다. 그림이든 해킹이든 격정적인 열망을 요구하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조용히 반복되는 잔잔한 업무도 있다. 그래서 열정이 아주 식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조용히 쉬는 순간이 왔을 때 할 만한 단순한 일들을 남겨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건 일할 때 굉장히 요긴할 인사이트다. 개발을 하다 보면 몰입이 잘되는 날은 메신저가 울리는 것도 모르게 일하게 될 때가 있는데, 몰입이 안 되는 날은 스스로 뺨을 쳐도 일이 잘 안될 때가 있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텐션 유지가 필수인데 이게 기복이 있으니 참 고민이었다. 단순하지만 시간이 드는 작업을 따로 정리해놨다가 텐션이 떨어질 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에세이인 '해커와 화가'와 여섯 번째 에세이 '부자가 되는 법'은 꽤 좋았지만 첫 번째 에세이인 '공부벌레는 왜 인기가 없을까'는 내가 왜 이걸 읽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많은 내용들이 기존 스타트업 관련 책에서 이미 접한 내용이기도 하고, 저자의 확신에 찬 어조가 다소 불편하기도 했다.

옮긴이인 임백준 씨가 서론에서 밝혔듯 '프로그래밍에 대한 그의 열정과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교양을 제공해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 나는 책의 곳곳에서 드러나는 그의 보수적인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세계관은 미국 중심이고, 부자 중심이며, 백인 중심이다.' 저자는 꽤 보수적이다. 

그의 성공은 특권 때문은 아니지만 특권은 보이지 않게 그를 도왔을 것이다. 다소 그의 관점이 아쉬울 뿐이지 그가 주는 모든 교훈을 비꼬아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다소 겸손했으면 어떨까.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는 건강한 신체를 가졌다는 것, 가족을 부양할 걱정 없이 스타트업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도 일종의 특권인데 말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 조금은 누그러진 어조로 책이 쓰였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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