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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지 Jun 26. 2020

이사 전 날에 할 일은 짐을 싸는 게 아니라

그간의 추억과 기억에 안녕을 고하는 것이다.

막연히 '이사'라는 캘린더의 일정을 볼 때마다 여느 태스크들처럼 무디게 느껴졌다. 그저 단어의 의미 '이사. 거처를 옮김'으로 받아들였고, 해야할 일로 받아들였다.

그러다 문득 맥주가 마시고 싶어 졌고, 편의점으로 향하며 익숙한 장소들을 스쳐 지나갔다.


'아 이 치킨집 맛있을 줄 알고 포장 주문했는데 그 맛이 그 맛. 가격도 그저 그랬지'

'남자 친구랑 헤어지고 이 족발집에서 친구랑 소주 마시며 눈물을 삼켰지'

'이 순대국밥집은 5년 전에 자취할 곳 알아볼 때 고시원을 가야 하나~ 회사 점심시간에 나와서 고시원에 들렀다 실망하고 뼈해장국으로 허한 마음을 달랬지'


그 맞은 편의 고시원에 찾아갔을 때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점심시간임에도 시간을 짐작하기 어려운, 어둑하고 눅눅한 분위기. 가난한 사회 초년생이기에 고시원부터 알아봤고, 김치와 쌀밥을 무한리필할 수 있다는 것에 기대를 안고 찾아갔던 곳이었다. 하지만 두 명이 지나가기 힘든 좁디좁은 복도에서 고시원 관리자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검은 봉지 밖으로 삐져나온 소주병을 들고 지나가던 할아버지를 보았다. 갑작스럽게 예상치 못한 이웃을 마주한 탓에 덜컥 모든 게 겁이났다. 통장과 인생 간의 무게추를 심란한 마음으로 들여다봤던 그 순간이 참 오랜만에 떠올랐다.


내일은 이사를 간다. 은행이 대주주고, 내가 개미이면 뭐 어떤가.

30년 동안 매달 갚아야 하는 돈이 있고 그래서 삶이 그닥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도 뭐 어떤가.

목구멍으로 차올랐던 서러운 마음을 뼈해장국으로 꾸역꾸역 삼켰던 초년생이 열심히 살았네.

정말 오랜만에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지금 살고 있는 전세집보다 작지만

역에서 더 멀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계약을 갱신하지 않아도 되는

싱크대 수전이 고장 나면 그저 스스로 판단하여 고치면 되는

나의 공간으로 이사를 간다.


바로 내일.


이제야 '이사 간다'는 것에 실감이 된다.

내일부터는 회사를 가는 그 경로가 다른 경로로 바뀔 것이고

자주 찾아갔던 편의점은 다른 지점으로 대체될 것이다.

삶의 공간을 전환한다는 이 변화는 은근히 나를 설레게 한다.


지난 5년간 혼자 밥해먹고 빨래했던 그 공간에

정중하고 애잔하게, 하지만 쿨하게 말하겠다.


그동안 잘 지냈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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